비혼과 여성 그리고 생태와 공동체를 지향하는 모임인 ‘정착과 유목 사이’를 시작으로 저의 귀농 이야기를 풀어가려 합니다. 뿌리를 내리는 정착민이고 싶으나 적절한 땅을 찾지 못해 정처 없이 떠도는 유목민으로 살던 시절 이야기입니다. 2007년, 모임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자본이 몰려드는 도시를 벗어나 독립적이고 유니크한 장을 꾸리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기 때문입니다. 온라인을 통해 1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고, 오프라인에는 20여 명의 사람들이 함께했습니다. 결혼을 한 친구도 있었고 나이도 성격도 제각각이었습니다.
우리는 2~3년 동안 세미나와 도보 여행, 자전거 여행, 채식 요리 등 여러 가지 일을 프로젝트 그룹처럼 진행했습니다. 뜻이 같아서인지 분위기는 다정하고 신선했으며 신비로운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우리를 하나로 연결해 준 하늘과 바람 그리고 우주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한 시간이었습니다. 이때 귀농에 뜻을 둔 다양한 이들과의 네트워크를 통해 단단하면서도 유연하게 정체성(Identity)의 근력을 다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기운에 힘입어 25살 한 해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에 첫 정착지인 전라북도 임실에 자리를 잡고 귀농했습니다. 겨울철의 이사라는 무리수가 있었지만 농한기에 먼저 짐을 풀고 봄을 맞이할 심산이었지요. 저를 품어 준 동거인은 2박 3일 귀농 교육을 함께했던 ‘산야시’(별칭, 힌디어로 ‘출가 수행자’라는 뜻임)인데 그녀는 제 어머니와 같은 나이이지만 친구처럼 스스럼이 없는 사이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연만큼이나 가벼운 짐을 풀고 함께 일상을 시작했습니다.
그 해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저는 산야시가 살아온 파란만장했던 치열한 삶의 이야기를 들으며 추위를 견뎠습니다. 부지런한 산야시가 봄나물을 캐러 일찍 집을 나서면 저는 전을 부쳐 새참을 준비했습니다. 작은 방에서 같이 먹고 자며 2달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난데없이 기거하던 공간의 소유권 문제가 생겼습니다. 시골이라 하더라도 구두로 계약하는 것은 소용없으므로 반드시 꼭 서면으로 계약해야 합니다. 때마침 적당히 허름한 빈집을 구한 친구 소개로 전라북도 무주 골짜기로 이주하여 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농사에 대한 관심은 아주 높았지만 막상 귀농을 한 뒤에는 오히려 힘을 빼는 것이 좋습니다. 당장 농사를 지어 수익을 내는 일보다 농촌 생활의 패턴에 서서히 적응하는 것이 무리수를 두지 않게 됩니다.
부엌 귀퉁이가 살포시 내려앉은 40여 년 된 집의 구들에 불을 넣어도 살짝 따뜻해지기만 하는 방에서 도시에서 켜켜이 쌓인 때를 벗겨냈습니다. 먼저, 작은 통과 버려진 프라이팬, 구들을 떼어 내고 남은 재를 이용해 생태화장실을 만들었습니다. 콩기름을 먹인 장판을 깔고 한지 벽지를 구해 방의 벽면을 도배했으며 외벽에는 오색 페인트를 발라 딱 우리만의 아지트를 만들고 나니 뿌듯했습니다. 집 뒤의 대밭에서 댓잎이 바람에 서로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툇마루에 누워 있으면 눌려 있었던 가슴이 트였습니다.
산으로 올라가 고사리도 꺾고 집 앞에 20~30여 평 정도의 텃밭에서 나오는 싱싱한 채소들이 작은 밥상에 가득했습니다. 소식과 채식을 좋아하던 터라 부족함을 몰랐습니다. 냉장고가 없어 담근 김치가 금세 신김치로 변했지만 김치전으로 부활하여 막걸리와 함께 또 한 상을 차리게 했습니다. 친구가 뒷산에서 따온 버섯으로 된장국을 끓였는데 식중독에 걸려 한나절을 고생한 적도 있습니다. 다행히 아랫집 한의사의 쑥뜸으로 소생했습니다. 버섯은 조심하세요.
그렇게 가을을 보내며 우리는 세계의 시골 마을과 생태 공동체 기행을 하자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습니다. 사실 질문의 시작은 난방이 잘 안 되는 시골에서 추위를 나는 방안을 모색하다가 농한기이므로 따뜻한 나라에서 여행 겸 겨울을 보내기로 마음먹은 것이었습니다.
여행 일정도 머물 곳도 딱히 정하지 않고 바람처럼 골목을 쏘다녔습니다. 여차하면 세계 일주도 좋겠다는 심정으로 떠났으나 중국과 태국, 라오스, 인도, 네팔 등을 지나 돌아왔습니다. 아름답고 혁신적인 생태 공동체에 마음이 끌리기도 했지만 저는 한 몸이 태어나고 탯줄과 같은 언어가 같아 자연스럽게 정서가 통하는 커뮤니티에서 살아온 시간의 위력을 느꼈습니다. 게다가 제가 먹어 온 음식의 중요성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쌀의 찰기와 된장이나 간장 또는 고추장의 장맛 그리고 김치의 풍미를 곁에 두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맛을 재현하는 농사를 짓고 싶었지요.
그렇게 다시 돌아와 충청남도 홍성 풀무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노동요를 불러가며 손모내기를 해 보았습니다. 나란히 쭉 늘어서 김매어 나갈 때 느꼈던 끈끈한 동지애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밖에 비닐하우스 짓기, 경운기와 트랙터 몰기 등 시골에서 살기 위해 필요한 기술과 즐거움을 배웠습니다. 무엇보다 눈빛이 맑은 선생님들과 개성이 강한 동기들과의 더부살이가 밑거름이 되어 좀 더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또 학교를 중심으로 마을 곳곳의 귀농인들과 연결되면서 마을살이의 가능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후 문경에서 공동체 생활을 100일 정도 하다가 본격적으로 반농반어의 삶을 살아보고자 제주도로 귀농했습니다. 문경에서 만난 친구와 서울 ‘빈집’에서 알게 된 친구가 뜻을 모아 여자 셋이 바다와 밭을 오가며 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가방 하나만을 달랑 매고 제주도로 내려갔습니다. 통장에 남은 돈 80만 원과 친구의 돈을 합해 집을 1년 동안 빌리고 자리를 잡았습니다. 통장 잔고는 비어 가벼웠으며 추웠습니다. 일단 생활비를 벌고자 근처 양식장에서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리고 친구의 지인 소개로 알게 된 한살림 생산자 강순희 언니와 연결되면서 우리의 제주도 농사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친구의 친구는 중요하다는 점이지요. 당시의 저희에게는 가느다란 인연의 끈도 절실했습니다.
제 생애 첫 바다의 시간이 펼쳐졌습니다. 먼저, 해녀학교를 다니며 가볍게 경험을 쌓다가 동네 삼춘들(제주도에서는 어른을 ‘삼춘’이라 부름) 틈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바다 세계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감동을 안겨 주었습니다. 숨을 참고 물속에 들어가 약 2분 동안 성게와 소라를 잡고 미역을 따고 보말을 잡았습니다. 처음에는 파도의 물결치는 요동이 몸에 남아 뭍에 나와서도 한동안 몸이 출렁였습니다. 바다는 목숨을 걸고 들어간다지만 의외로 고향에 온 것처럼 마음을 고요하고 편안하게 합니다. 아마 의지할 수 있는 친구와 함께하여 더욱 그러한 마음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약 2,000평의 밭을 빌어 기계의 힘없이 여자 셋이 합심하여 부지런히 움직였습니다. 녹두와 팥, 콩, 깨, 마늘, 고구마, 감자 등을 지어 팔았습니다. 자동차가 없어 자전거에 포대를 묶고, 괭이를 싣고 바람이 잦은 섬 곳곳을 다녔지요. 밭에서 일하다 탕탕물(차가운 민물로 용천수를 일컫는 말임)에 들어가 물놀이도 하고 바다에 풍덩 들어가 열을 식히며 까맣게 익어갔습니다.
우리는 마치 히치하이커처럼 살았습니다. 땅도 집도 빌린 상태였고 실제로 멀리 이동할 때는 길가에서 손을 흔들어 오가는 차량 중에서 인심 좋은 차를 이용했습니다. 그리고 히치하이킹의 처음과 끝이었던 강력한 인연으로 만난 여성농민회의 언니들과 함께 토종씨앗을 찾아다니고 풍물을 배우며 농악을 익혔습니다.
부딪히면 상상을 초월한 현실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정말로 바라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산과 바다 그리고 밭이 좋아 꿈꾸었던 반농반어의 삶과 친구들의 환상적인 조합에 지금도 여전히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착과 유목 사이’ 모임을 제안하며 건넸던 시를 다시 적어봅니다.
종종 나는
진보를 믿지 않는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림은 이미 그려졌고
가장 아름다운 시들도
내 곁에 모아두었다
음악도 더 이상은 필요 없다
가장 멋진 뇌성 번개를
이미 머릿속에서 그려보았고
가장 아름다운 눈(雪) 은
내 머릿속에서 내린다
제일 중요하다는 봉우리들을 보았으며
가장 깊은 계곡도 구경하였다
바다는 상상 속에서
언제나 가장 괄목할 만하다
자동차의 속도가 어찌
쏟아지는 비나 시편의 시들
평범한 지역과 간단한 문장
소박한 생활을
능가할 수 있겠는가?
종종 나는 모든 것이 충분하다 고 믿는다
…… (중략)
― 가브리엘레 보만, <나는 종종 진보를 믿지 않는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