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달란트(능력치)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앞선 목회의 예를 들자, "나는 몇 명의 성도들을 감당할 수 있는 달란트를 가졌는가"이다. 나는 이에 대해서 보다 연구가 필요하고 그것을 할 수만 있다면 수치화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운동선수의 능력을 측정해서 거기에 맞는 종목을 정하거나 한 종목 안에서도 포지션을 정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아가 자신의 부족한 능력을 집중적으로 강화할 수도 있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목회자가 갖추어야 하는 능력들을 정리하고 그것들을 평가하는 방법을 개발해야 한다. 대략적으로 생각해보면 설교, 대인관계 능력, 행정능력, 위기 대처능력 등이 목회자에게는 필요하다. 이러한 것들은 외부에서 목회자 자신을 평가하는 것들이다. 배우자, 성도 그리고 동료 목사들에게 물으면 어느 정도는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목회자 내부로부터 측정을 하는 쉬운 방법이 있다. 그것은 "내가 지금 목회를 즐겁게 하는가?"이다. 목회가 즐겁다면 그것은 내 달란트 내에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목회가 희생으로 느껴지고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것에 낙심하고 있다면 자기 능력치를 벗어난 것이다. 이러한 목회를 지속하면 그 목사는 결국 목회를 자기희생이나 자기 의로 삼고 만다. 그러니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해보면 될 것이다. 나는 몇 명의 성도들과 교회를 이루며 목회할 때 여전히 즐거운가?
달란트에 대한 이해가 스스로의 한계를 지어놓고 거기에 갇혀 사역하라는 것이 아니다.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각기 받은 달란트로 이윤을 남긴 종들에게 주인은 더 큰 일을 맡긴다. 이 이야기는 두 달란트를 받아서 두 달란트를 남긴 종은 이제 네 달란트를 받은 종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의 능력이 한 달란트였고 충성되게 일해서 두 달란트를 만들었으니 일이 끝난 것이 아니다. 이제 두 달란트로 네 달란트를 만드는 일이 주어진 것이다.
과연 교인수로만 목사의 달란트가 평가될 수 있는가? 앞서 교인수의 예는 달란트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조금은 극단적인 예다. 내 주변에는 작은 교회에서 사역을 하지만 그 영향력은 대형교회 목사 못지않은 분들이 있다. 교회 자체도 크기는 작지만 많은 일을 감당하는 교회들이 있다. 그러니 달란트는 그 은사와 연동해서 생각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가르치는 은사가 있다면 그가 가르치는 일의 능력치가 어느 정도인가를 알아야 한다. 거기에 따라서 어떤 기관에서 어떤 사람들을 대상으로 은사를 써야 하는지가 결정된다.
나는 달란트와 은사에 대한 이해가 개인에게만 적용된다고 보지 않는다. 이러한 이해는 교회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이러할 때 각 교회들은 그 부르심과 은사를 따라서 개체성을 갖는 것이다. 사람들이 왜 교회가 이렇게 많아야 하는가 하고 물으면 이것이 그 답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