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는 두 가지 공감 능력을 가져야 한다. 하나는 성경과의 공감 능력이고 다른 하나는 청중과의 공감 능력이다. 성경과의 공감 능력만 있는 사람은 학자가 되기 쉽고 청중과의 공감 능력만 있는 사람은 연설가가 되기 쉽다. 설교자는 이 두 가지 공감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비로소 성경학자도 연설가도 아닌 설교자가 된다.
청중과의 공감 능력은 설교자를 성경학자와 구별 짓게 만든다. 설교자는 성경이라는 숲을 청중과 함께 들어가야 한다. 설교자가 청중 없이 혼자만 성경 본문에 들어갈 경우, 지극히 개인적인 메시지를 찾아내거나 성경 해석 자체에 함몰되기 쉽다. 이런 설교자는 때때로 자신이 해석한 내용에 자아도취된 나머지 성경 해석으로만 가득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자신은 설교를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청중은 이런 설교에 공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청중의 삶과 언어에 충분히 공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목회에 있어서 청중과의 공감은 다양한 방식의 교제에서 생긴다. 이때 가정이나 개인을 여러 명이 방문해서 예배드리는 방식의 전통적인 심방보다는 성도 개인의 스케줄에 맞추어 짧더라도 자주 대화를 나누는 방식이 삶이 다양화된 현대 교회에 더 적합하다. 이렇게 성도와 만나는 목사는 그 성도의 형편을 위해 기도하고 함께 고민한다. 결국 성도의 다양한 고민들을 안고 성경본문을 해석할 때 청중이 공감하는 메시지가 나온다. 이것은 유창하고 훌륭한 많은 설교자들의 설교가 결코 대치할 수 없는 지역교회 목사 즉 "나의 목사"의 설교를 만든다.
두 번째로 성경과 공감 능력은 설교자를 연설가와 구별 짓게 만든다. 청중을 감동시키는 방법은 다양하다. 설교의 겉 양식인 연설은 청중과 나누는 일종의 의사소통 즉, 대화이다. 청중은 때때로 연설가가 전달하는 내용보다 그의 태도, 눈물, 제스처, 목소리 등 비언어적 요소에 의해서 감동을 받기도 한다. 이것은 마치 외국 노래의 가사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는 우리 모습과 같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청중이 눈물을 흘리거나 격하게 호응한다고 해서 자신이 설교를 잘했다 혹은 잘한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설교자를 설교자로 만드는 것은 그가 전하는 메시지이다. 그 메시지가 성경에서 나오고 성경과 일치할 때 비로소 연설은 설교가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설교자는 성경 연구에 공을 들여야 한다. 먼저는 성경본문 자체를 반복적으로 연구하고 묵상해야 하며 더 깊은 이해를 위해 다양한 서적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청중들에게 이미 익숙한 성경본문에서 새로운 메시지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설교자가 해석에 있어서 청중들보다 더 전문적이지 않을 때 그 설교는 식상한 설교가 된다. 청중은 동일한 본문에서 본인들과 다른 인사이트가 있거나, 그 본문을 가지고 세상을 보는 다른 인사이트가 있어야 기대를 가지고 설교를 듣는다.
청중과의 대화와 성경과의 대화에서 공감을 끌어내는 것은 단순히 시간의 양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 대화의 깊이가 중요하다. 그리고 그 깊이를 결정하는 것은 설교자가 가지고 있는 고민하는 태도다. 우리가 아는 훌륭한 설교자나 연설가는 대부분 남들과 비교할 수 없는 고난의 강을 건넌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고난의 강을 건너면서 인생과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나니 훌륭한 설교자나 연설가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은 인위적으로 만들 수도 없고 쉽게 일반화할 수도 없는 것이다. 반면에 고민은 누구나가 할 수 있다. 청중과의 대화와 성경과의 대화의 깊이를 더하는 방법은 이 고민이다. 고민이라는 진지한 태도로 청중과 대화하고 성경과 대화하는 사람은 기대감을 가지고 그 청중에게 성경이 주는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그 성경이 그 청중에게 말하는 메시지를 찾았을 때 열정을 가지고 그것을 전달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설교는 하나님과 청중 사이의 공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