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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식 Feb 24. 2022

사후(事後)와 같은 사전(事前)

   창세기 4장 앞부분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 장면을 처음 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께서 왜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않고 아벨과 그 제물은 받았을까 하고 의문을 갖게 된다. 이 답은 히브리서 11장에 가면 믿음 때문이라고 쉽게 답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창세기 4장만으로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것일까?


   사후(事後) 즉, 일이 일어나 후에 그 사람의 행동이나 삶을 보면 그 일 이전 즉 사전(事前)에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고 어떠한 일을 했는지 추적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제사를 드리기 이전의 가인과 아벨의 삶은 너무도 간략히 묘사된 반면 제사 이후의 둘의 행동은 눈에 그려지듯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자신과 그 제물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자 가인은 자신을 되돌아보기는커녕 안색이 변하며 화를 냈다. 그리고 마침내는 마치 아벨 때문에 자신이 피해자인 양 혹은 아벨만 없으면 된다는 양, 동생을 백주 대낮에 죽였다. 이 일로 가인이 제사 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하나님도 동생도 사랑하지 않는 자였다. 그가 하나님을 사랑했었다면 하나님께서 그와 그 제물을 받지 않으셨을 때,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를 했을 것이다. 또 그가 가장 가까운 이웃인 동생 아벨을 사랑하는 자였다면 아벨을 축하하며 함께 기뻐했을 것이다.


   교회 문제들은 종국적으로 분쟁을 향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고린도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를 교회 분쟁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에서 벌어지는 제반의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교회 분열의 책임은 결국 담임 목사에게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성도의 문제이건 담임 목사 개인의 문제이건 말이다. 그것은 먼저는 담임 목사가 최종 책임을 지는 위치이기 때문이다. 담임목사는 담임하는 교회와 영광만이 아니라 수치도 함께 지는 자리이다. 그러니 담임목사가 그 와중에 성도 탓을 하는 것은 아버지가 자식 탓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둘째로 담임목사가 교회 분열을 막을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자신 때문에 발단되었다면 더더욱 그러하겠지만 그렇지 않고 간혹 담임목사가 억울할 정도로 누명을 쓰고 있다 하더라도 담임목사가 자신의 안위나 지위를 내려놓으면 교회는 최소한 분쟁과 분열로 가지는 않는다. 그런데 담임목사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법과 정치에 의지하기 시작하면 교회는 결국 분열되고 성도들은 상처투성이가 된다. 자신의 문제 때문이라면야 그동안 누렸던 혜택이나 영광을 모두 토해놓고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것이고 혹 다른 이유 때문이라도 책임을 지고 빨리 사퇴하는 것이 교회를 위하는 길이다. 이것이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신뢰하는 담임목사의 태도요, 성도와 교회를 끝까지 생각하며 사랑하는 태도인 것이다.


   재신임투표를 해봐야 알 수 있는가? 그렇게 해서 2/3가 찬성하면 나머지 1/3을 정죄하고 내쫓아가면서 교회에 남아 있어서 얼마나 더 큰 영광을 누릴 것이며 어떻게 그 상처들을 싸매가며 목회를 할 것인가? 그 1/3은 그동안 사랑하지 않았단 말인가? 사랑으로 비로소 모든 법이 온전케 되는 것이 아닌가? 그저 법을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만 이용한다면 그는 법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 법이 존재하는 이유인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 말이다. 교회 분열 문제가 생겼을 때, 담임목사가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보면 그가 평소에 어떤 목회자였는가를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신대원에서 노년의 교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목회자상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분은 목사는 억울한 일로 교회에서 쫓겨날 때조차도 그 교회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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