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는 기형적이라고 할 만큼 목사에 의존한다. 목사는 성경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특별한 존재로 여겨져 왔다. 목사가 그 기능에서만 교인들과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특별한 소명을 받아 구별된 것처럼 여겨진다는 것이 문제다. 게다가 그러한 목사가 교회에서 가진 권한과 책임은 정치체계에 따라 구분되는 교단과 상관없이 너무 과다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약에서 사역자의 모델로 삼는 바울은 사역자와 피사역자인 교인들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신약성경에 나오는 교회들 가운데 가장 문제가 많았던 고린도교회에 보낸 그의 편지 두 편인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에 잘 설명되어 있다.
고린도전서가 교회의 문제를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정의로부터 풀어간다면 고린도후서는 사역자인 바울과 피사역자인 고린도교회의 교인들과는 어떤 관계인가라는 정의에서 풀어간다. 교회의 구성원은 크게 보면 사역자와 피사역자이다. 한국교회가 가진 문제들 중에 목사에 관한 것들은 대부분 교회와 사역자(목사)가 어떤 관계인가에 대한 성경적 이해의 부족에서 기인한 것이다. 어떤 목사들은 성경의 이곳저곳을 인용해서 마치 목사만이 축복권을 가진 것처럼 가르치기도 한다.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후 1:24)
이 말씀에서 바울이 가지고 있던 사역자로서의 본인의 정체성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자신은 결코 교인들의 믿음을 주관하는 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주관하다"는 것을 영어로 "To lord over"로 NIV 성경이 번역했다. 쉽게 말해서 주인 노릇 한다는 것이다. 지금 존재하는 어느 목사가 사도 바울보다 더 큰 능력과 희생을 가지고 있는가? 아무도 없다. 그런데 그러한 바울이 경계한 것이 무엇인가? 바로 교인들을 주관하는 것이다. 교인들에게 주인처럼 행세하는 것이다. 주의 종이라고 일컫고 목사에게 잘하면 복을 받고 못 하면 저주받는다는 가르침은 어디서 나왔는가? 그것이 혹 체험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아니면 목사직의 중요성을 강조한 나머지 나왔다 하더라도 그런 말을 목사 스스로는 절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국교회에 본인이 교회의 주인 행세하는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니 교세가 크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목이 곧게 되고 교세가 작으면 주눅이 들어있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교인들은 그러한 목사를 더 이상 존경할 필요가 없다. 과감히 그러한 목사들을 멀리해야 한다.
그렇다면 목사의 진정한 역할은 무엇인가? 바로 교인들의 기쁨을 돕는 자이다. 교인들과 함께 일하며 돕는 자이다. 교인들이 행복한 것을 자신의 행복으로 여기는 자이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2장에서 이 이야기를 이어간다. 거기에 교인들의 근심이 기쁨으로 바뀌기를 바라는 바울이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바울의 마음은 고린도전서 4장 15절과 16절에도 잘 나타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아비라고 말한다. 이것을 권위주의적으로 잘못 읽어 주인행세의 근거로 삼으면 안 된다. 아비란 자녀에 대하여 무한책임을 지되 그 자녀와 자신이 동등됨을 잊지 않는 자다. 나는 세 자녀를 키우다 보니 이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모든 필요한 것을 다 채워주는데 아이들이 나와 동등하다고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그저 아비인 나에게 종속적인 존재로 보는 우를 자주 범한다. 목사들도 그럴 때가 많다. 내가 교회에서 누구보다도 많은 일들을 하니 당신들은 내 말을 들으시오라고 무언의 압력을 넣지 않는가? 내가 가르치고 저들은 배우니 내가 저들보다 낫다고 착각하지는 않는가 말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6절과 7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바울은 자신의 책임이 무엇이고 자신이 가진 권한의 한계가 어디인지 명확히 알았다. 반면에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자신들에게 영향을 끼친 아볼로를 따라 아볼로파를 만들고 바울을 따라 바울파도 만들었다. 마찬가지 현상이 목사 의존도가 기형적으로 높은 한국교회에도 일어난다. 그럴 때 목사는 교인들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파를 만들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려야 한다. 한국교회 교인들이 가진 그 선한 충성심은 때때로 잘못된 정체성을 가진 목사를 괴물로 만들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향방 없는 열심을 회개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가르치는 자를 존경하는 좋은 문화는 이어가되 목사 또한 교인들 중에 하나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