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정식 Jan 03. 2022

교회 사랑은 이제 그만

교회의 문제는 대부분 교회 자체를 너무 사랑해서 생긴다. 교회가 예수님의 몸이니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목사들이 빠지는 오류 중에 하나다. 교회가 예수님의 몸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머리로서 교회의 통치자가 되신다는 의미와 예수님께서 그 피로 값을 치렀다는 의미에서 그런 것이다.


어떤 목사는 예수님보다(예수님께서 하시는 것보다 혹은 예수님이라는 대상보다) 교회를 더 사랑한다. 그래서 자기의 허물이 드러나도 자신이 무너지면 교회가 무너진다는 논리로 허물을 덮기에 바쁘고 성도들을 네 편 내편으로 나눠서 결국은 교회를 파국으로 몰고 간다. 성도들이 다 떠나고 교회 간판을 내리면 좀 어떤가? 그 성도들이 피투성이가 되어서 결국 예수님을 떠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교회가 모든 재산을 정리해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느라고 예배당이 없어지면 어떤가? 그 예배당을 보는 사람마다 하나님을 욕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이 모든 것이 하나님보다, 예수님보다 교회를 더 사랑하는 목사들 때문에 생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성도들도 예수님보다 교회를 더 사랑한다. 그래서 끝까지 교회를 지키겠다고 한다. 본인들이 오랫동안 수고하고 애쓴 교회를 나오는 것이 그렇게도 억울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돈 한 푼 받지 않고 청소하고 가르치고 게다가 없는 살림에 힘들어도 꼬박꼬박 헌금까지 했으니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흡사 10년 동안 뒷바라지해서 고시 합격을 시킨 남자 친구가 재벌집 여자와 결혼한다는 드라마 소재와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교회에 희생만 하고 교회를 행복하게 사랑하지는 않았다는 말인가? 연애하면서 행복했으면 흡사 결혼을 하지 못하고 헤어지더라도 그 연애가 여전히 의미가 있지 않은가? 목사나 목사파가 죽던 내가 죽던 하며 끝장을 보기까지 싸워서 원수가 되는 것보다 그들의 불의를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는 것이 낫지 않을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개인에게만 혹은 성도에게만 적용시켜왔다. 그래서 교회의 자기 자랑은 부덕이 아니라 미덕이 되어왔다. 성도들도 목사들도 자기 교회 자랑하기 바빴고 더 나아가 이를 위해서 교회의 허물을 덮기 바빴다. 다들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위한다는 미명 아래 말이다. 그 사이에 세상은 교회를 바리새인이라 생각하고 있다.  교회는 우리가 사랑할 대상이 아니라 단지 은혜로 죄 용서를 받은 사람들의 모임인 바로 우리 자신들이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따라 우리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하고 싶은 일을 내려놓고 예수님께서 세상을 위해서 하라고 시키시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 우리 자신의 편의와 편리를 내려놓고 이웃을 위해서 스스로 불편해져야 한다. 


사랑은 더 주지 못해서 늘 미안한 마음이다. 내가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은 사랑이 아니다. 교회를 사랑한다고 확신하는가? 교회를 위한 걱정에 잠 못 이루는가? 본인이 바울의 경지가 아니면 그 교회를 지금 떠나라. 그 교회는 그러한 당신이 없어야 오히려 더 나아질 것이다.

이전 12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