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정식 May 07. 2024

소명(召命)과 사명(使命) I

우리는 자신을 소개할 때 "누구이며 무엇을 한다"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누구이다"는 것을 "소명"이라고 하고 "무엇을 한다"는 것을 "사명"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저는 목사입니다"라는 것은 소명을 말하는 것이고 "저는 소금교회를 섬깁니다(혹은 소금교회에서 사역합니다)"는 사명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영어로 설명하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be 동사"로 소개하는 부분은 "소명"에 해당하고 "do 동사(일반동사)"로 설명하는 부분은 "사명"에 해당한다. 앞서 예를 든 것을 영어로 설명하면 "I am a pastor"는 나의 소명을 말하는 표현이고, "I serve the Salt church"는 나의 사명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명은 "calling"으로 사명은 "ministry(task, mission)"등으로 각각 번역할 수 있다. 성경에서 바울은 이 두 가지를 분명히 구분한다.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소명, calling)을 받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는 사명(task, ministry, mission)을 받았다.

   반면에 소명과 사명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이다. 소명이 없이 사명이 있을 수 없고 사명이 없이 소명을 설명할 수 없다. 소명은 사명의 원인이 되고 사명은 소명의 결과가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명확히 알아야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을 파악할 수 있다. 글을 쓰는 나는 목사로 소명을 받았고 성경을 가르치고 성도들을 돌보는 일이라는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바울의 예를 들면, 바울은 사도로 소명을 받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모두 마쳤다. 교회는 소금과 빛으로 소명을 받았고 짠맛을 내서 세상을 부패하지 않게 하는 일과 빛을 비춰서 세상을 밝게 만드는 일이라는 사명을 받았다. 이처럼 소명과 사명은 그 의미에서 분명히 구별이 되지만 실제로는 혼용해서 쓰일 정도로 연결돼 있어서 분리시키기가 어렵다.

   소명과 사명이 나의 정체성을 구성한다고 할 때 논리적으로 소명이 항상 먼저 온다. 군인이라는 소명이 먼저 오고 전방을 지킨다는 사명이 나중에 주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자신의 소명을 이해하거나 설명할 때는 두 가지가 중요하다. 하나는 나를 부르신 존재가 누구이고 내가 누구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냐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고 자신은 이방인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고 항상 설명한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하면 어떤 사명(일, 임무)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냐는 것인데 바울은 자신이 복음 전하는 일이라는 사명을 받았다고 확신했다. 반면에 나의 사명을 이해하거나 설명할 때는 여러 가지 의문사를 사용해야 한다.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얼마 동안) 해야 하는가를 알아야 비로소 나의 사명이 명확해진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소명은 상당히 수동적인 것이지만 사명은 상당히 능동적인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내가 이렇게 소명과 사명을 구분하는 일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자신의 소명과 사명을 잘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을 모르고 방황하면서 인생을 허비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him) 이방인을 위하여(for the gentiles) 복음을 전하도록(to share the gospel) 부르셨다는 자기 소명이 분명했다. 이런 바울이 만약에 자신을 부른 존재가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인들이라고 오해하면 바울은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말에 순종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 교회의 목사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 지역교회를 위하여" 부르셨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 지역교회가" 자신을 "하나님을 위하여" 불렀다고 잘못 생각한다면 그는 그 지역교회를 하나님의 뜻대로가 아니라 성도들의 뜻대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성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는 한 성도를 그 지역교회를 위하여(for the church) 그리고 그 지역교회를 섬기도록(to serve the church) 부르셨다. 이것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성도들이 많다. 자신이 스스로 그 교회를 선택했다고 오해하는 성도는 그 교회를 좌지우지하려고 한다. 반면에  그 교회가 자신을 불렀다고 오해하는 성도는 그 교회가 성도 자신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며 불평한다.

작가의 이전글 내 은사는 배달(Delivery)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