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 교회를 처음 다니면서 접한 설교는 주제설교였다. 당시 중고등부 부장집사님께서 중고등부예배에서 주로 설교를 하셨는데 가장 많이 들었던 내용은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는 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때때로 "죄를 회개하라"는 메시지도 하셨는데 예배가 끝나고 하는 기도회에서 우리는 "천부여 의지 없어서"라는 찬송을 무릎 꿇고 부르며 매주 회개를 했다. 하나님께서 예배에 사모하는 마음을 주셔서 장년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담임목사님 설교를 듣기 시작했다. 담임목사님의 설교는 부장집사님 설교보다 훨씬 길었고 성경의 다른 본문에 대한 언급이 많아서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고입시험 준비로 바빴던 중3 시절에 나는 신앙에 더욱더 빠져 지냈다. 중고등부예배, 장년예배, 주일저녁예배 그리고 수요예배와 금요구역모임까지 참석하다가 새벽예배와 주일학교예배에도 참석을 했다. 이런 내 모습에 교회 어른들은 적잖이 걱정도 하셨다. 이렇게 교회의 거의 모든 모임에 참석하니 몰랐던 성경을 더 알게 되었고 6개월이 지나니 담임목사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실지 예상을 할 정도가 되었다. 이 시절 설교를 들을 때 내 자세는 무조건 아멘이었다.
그 무렵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기드온에서 무료로 나눠준 신약성경을 읽곤 했다. 본문의 맥락을 이해하기보다는 이해하기 쉽고 직설적인 성경구절들을 읽고 옮겨 적었다. 내가 설교 시간에 들었던 본문과 구절을 직접 읽는 것은 마치 듣기만 하던 것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새벽예배를 마치고 집에 와서 종종 라디오로 극동방송을 들으면서 당시에 아주 유명한 설교자였던 곽선희목사님과 김진홍목사님의 설교를 접할 수 있었다. 김진홍목사님의 설교는 간증이 많이 담긴 설교여서 인상적이었고, 곽선희목사님의 설교에 대해서는 성경을 어쩌면 저렇게 잘 설명할까라며 감탄했었다. 이렇게 설교를 듣는 것을 좋아하던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주일학교 교사가 되면서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어린 친구들에게 한 달에 한번 정도씩 하는 설교였는데 성경본문을 설명하고 교훈을 찾아 전달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대학생이 돼서 서울의 한 대형교회를 1년 동안 다녔는데 그때 들었던 사도행전 강해설교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매주일 사도행전 본문을 이어서 설교하는데 각 본문의 내용을 파악하고 주제를 찾아서 전달하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지금 생각하면 QT 하듯이 본문을 해석하는 수준을 뛰어넘지 못한 한계를 가졌지만 설교자인 목사님이 가진 선교에 대한 열정과 헌신이 고스란히 설교에 녹아져 있었기 때문에 듣는 사람의 마음을 뜨겁게 만들었다. 신학대학원을 다니면서 공부한 신학이 성경을 보다 깊고 풍성하게 해석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열정과 헌신까지 자동으로 따라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때때로 성경을 잘 해석한 설교보다 열정적인 설교에 감동을 한다.
고1 이후로 지금까지 설교를 하고 있으니 나는 33년째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설교를 했지만 나는 여전히 설교하는 것을 좋아하고 영광으로 여긴다. 동기 목사들을 만나면 종종 설교를 주제로 토론을 하기도 하고 서로 조언을 주고받기도 한다. 내가 설교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그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설교를 준비하는 것은 언제나 가장 큰 스트레스다. 설교는 아주 종합적이어서 쉽게 평가하기 어렵다. 내용과 전달, 공감과 몸짓 등 각각의 부분을 일일이 떼어내서 평가하고 개선하면 그저 평범한 설교가 되고 마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설교는 설교자와 분리돼서 평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설교자와 분리된 설교는 흡사 몸이 없는 영혼처럼 헛 것이 된다. 그러므로 설교의 종류는 설교자의 수만큼이나 다양할 수 있다. 그 설교자만이 만들어내는 메시지가 설교로서 의미를 갖는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성경본문을 그냥 소리 내서 읽거나 유명한 설교자의 설교를 예배시간에 틀어놓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설교자들은 대부분 자기 설교의 지향점을 가지고 있다. 친한 동기 목사의 설교는 "변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래서 성경본문에서 메시지를 찾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실제로 성도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일러준다. 뿐만 아니라 교회가 그 일을 함께 하기 위해서 프로그램도 만들고 일주일 내내 성도들을 격려한다. 최근에 그 친구의 설교를 듣다가 갑자기 내 설교의 지향점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그 지향점을 신학대학원 때 다짐을 하고 한 동안 잊고 있었다. 그 동기 목사가 내 설교에 대하여 평가하면서 "친절하다"는 표현을 썼다. 내가 성경본문을 친절하게 설명해 준단다. 그의 평가는 내 설교의 지향점과 맞닿아 있다. 신학대학원에서 성경신학을 배우면서 나는 성도들에게 "성경을 남기는 설교"를 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나는 아멘을 강요하거나 억지로 주제를 짜 맞추는 설교를 싫어한다. 때때로 성경을 남기는 데 설교자의 감정 표출이 방해가 되기도 하니 감정을 표출하는 것도 자제하는 편이다. 나는 성경의 능력을 믿는다. 나는 성경이 송이꿀보다 더 달다고 한 시편 기자의 고백에 동의한다. 그래서 나는 성경의 맛을 각인시키고 성경의 영양이 고스란히 성도의 속사람에 스며들게 만드는 것이 설교자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교회에서 설교자를 종종 요리사에 비유한다. 재료에 따라 요리법이 다르듯이 성경본문에 따라 설교법이 달라야 한다. 훌륭한 요리사가 맛과 영양을 모두 챙기는 것처럼 훌륭한 설교자는 성경의 맛과 영양을 모두 성도들에게 전달한다. 맛이 없으면 강요가 되고 영양이 없으면 불량식품이 된다. 하지만 요리의 기본이 있는 것처럼 설교에도 기본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성도들로 하여금 성경을 먹게 만들고 성경으로부터 능력과 은혜를 얻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이 기본에 다시 충실하기로 다짐한다. 성경을 남기는 설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