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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맘디터 Apr 13. 2024

7회: 여왕을 따라다니는 꿈

아버지와 어머니의 등은 표정이 달랐다.

왕의 등은 뼈가 드러날 정도로 왜소하고, 왕비의 등은 수 겹의 옷에 쌓여서 그 진심을 알기 어려웠다. 아버지는 이 세상을 떠나고 싶은 듯했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떠나고 싶거나 또는 려를 포함한 모든 환경에서 떠나고 싶었다.


왕비는 병든 사람과 모든 시간을 함께 한 자기 자신이 가여웠고, 자신이 너무 불쌍한 나머지 이 지긋지긋한 무한 반복의 시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여왕의 자리에 올라야 하는 딸의 안위나 남편의 임종 등은 각자에게 주어진 냉혹한 과제일 뿐이다. 위대한 지혜와 모습을 지닌 딸 앞에 서 있는 자신은 비 온 뒤 뙤약볕에 갈라져버린 볼품없는 진흙이고, 아무리 병과 싸워도 굳건히 왕의 자리에 있는 남편의 눈동자는 늘 왕비를 기죽게 했다. 모든 힘을 가진 남편의 손에 언제든지 죽을 수 있고, 나의 쓸모가 저 사람에 의해 결정된다는 무기력은 왕비의 생명력을 좀먹어갔다.


려는 어머니를 이해하고 싶었지만, 어머니가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에 술 취한 듯 몽롱해졌다는 것을 알고는 모든 노력을 포기다. 어머니는 불쌍한 자신, 화려했던 자신, 자신이 원하고 상상하는 자기의 모습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대화하면서 자기 연민 속으로 깊이 빠져들어갔다.


아버지는 병의 고통과 싸우며 자신의 죽음이 도달할 숲에 대하여 고민다.

아버지가 려를 데리고 찾아간 곳은 네 개의 숲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다.

네 개의 숲으로 들어가는 길은 눈앞에서 갑자기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갑자기 생기곤 했다.

죽음만이 들어갈 수 있는 네 개의 숲은 살아 숨 쉬는 그 누구에게도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죽음만이 걸어 들어가는 그 길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살아 있는 그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았다.

왕은 딸의 손을 잡고 그 길목에 선다. 흔들리는 아버지의 손을 부축하고, 려는 아버지가 바라보는 그 숲을 함께 바라본다.


바람이 불고 흙먼지가 날리다가 서서히 모든 움직임이 멈춘다. 잠시 후에 태양은 회색빛에 숨어서 퇴장을 준비하고, 짙은 어둠은 회색빛의 도움으로 등장을 준비하는 그 시간. 살아 있는 모든 것의 형태가 사라지고 오직 가느다란 선 하나만이 세상에 존재한다.


잠시 후 아버지 앞으로 죽음의 길이 생긴다. 아버지는 미소 지었다. 려는 두려운 마음을 감추면서 아버지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버지, 우리 돌아가요."


아버지는 려의 손을 잡았다.

"이제 나는 삶이 아니라 죽음으로 존재하는구나. 려야, 네 개의 숲이 열어주는 길이 보이느냐"


려는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젓는다.

"저는 아직 아무런 준비가 안되었어요"


"난 기다렸지... 하루하루 고통에 몸부림쳤지만, 그래도 너를 바라보며, 나는 흉내 내지 못한 생의 기품을 갖추는 너에게 늘 감사했단다. 얘야, 아비는 라의 숲에 도착하더라도 원망하지 않을 거란다. 살아 있는 나는 늘 내 운명을 원망했지만, 죽은 나는 이제 그 어느 것도 원망하지 않으려고 한다."


아버지는 점점 공기로 흩어지며 죽음의 모습으로 네 개의 숲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아버지를 뒤따라 가는 려의 발걸음 앞에서 숲으로 가는 길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려는 아무리 뛰어도 제자리걸음으로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려는 작은 비명과 함께 자신의 이불 위에서 눈을 떴고, 자리에서 일어나 하염없이 눈물을 닦았다. 거울 속에 비치는 얼굴에 눈물자국이 났지만, 소매로 닦아 내렸다. 소매가 지나간 자리마다 붉은 기가 올랐다.


려는 머리를 가볍게 단장하고, 처소의 모든 문을 열도록 지시했다. 저 쪽에 떠오르는 점 하나의 태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낼 것이며, 당신들은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려는 머리맡에 놓여 있던 서책들의 뒷 장을 넘겼다.


찬 바람이 려의 귀를 어루만지고, 작은 새들은 떠오르는 태양이 지루한 듯이 지붕에 앉아서 졸다가 서로를 깃털로 보듬어 주었다. 


려의 침소를 향해 아침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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