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차 여행기
세 아이가 시댁에 놀러갔고, 남편은 모처럼 집안일 리스트를 들고 분주하게 왔다갔다합니다.
눈치를 보다가 남편에게 양양 설악해변으로 차박을 가자고 던졌습니다. 이제 곧 여름이 오면 차박도 어려우니 이때가 딱 좋다고 소곤소곤 악마의 속삭임을 읊었습니다.
남편은 너무 아무렇지 않게 "혼자 다녀 와~"
그 말을 듣자마자 "알았어!!!!"
남편의 황당한 표정을 뒤고 한 채 짐을 바로 싸고, 남편의 마음이 변할까봐 최대한 빨리 시동을 걸고 출발했습니다.
서울을 빠져나갈 때에는 당연히 막혔지만 서울을 벗어난 후부터 춘천양양고속도로는 오늘 저에게 길을 활짝 열어주었습니다. 그런데 들뜸도 잠시. 잠이 쏟아집니다. 홍천휴게소에 내려서 수십년만에 처음으로 껌을 사 보았습니다. 정말 신기하게 껌을 씹으니 잠이 싹 달아납니다. 그렇게 양양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설악해변에 도착했는데 뷰가 좋은 자리는 당연히 꽉 차 있습니다. 그런데 운 좋게도 한 자리가 비어서 그 자리에 주차할 수 있었습니다.
다들 의자에 앉아 낭만적인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저는 너무 배가 고파서 씩씩하게 삼겹살을 굽기 시작했습니다. 연기가 정말 심하게 났지만 부끄러움보다 배고픔이 불편했기에 열심히 고기를 굽고 밥을 먹었습니다.
고기 냄새가 퍼지면서 옆 차들도 한 팀씩 한 팀씩 이른 시간에 고기를 굽기 시작합니다.
이제 배가 부르니 바다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번 여행의 동반자인 아일랜드 작가 제임스 조이스의 책을 들고 바닷가로 나갔습니다.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을 읽으면 나 자신의 하찮은 감정들도 무게감 있게 느껴지고, 알 수 없는 나와 타인의 행동들이 조금 이해가 됩니다. 제임스 조이스는 아일랜드 사람들을 묘사하면서 그들만이 갖고 있는 삭막함과 허탈함, 따뜻하면서도 냉정한 듯한 이면적인 방황을 그리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저 소설을 읽다 보면 나와 똑같은 인물을 한 명 정도는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책을 조금 읽다가 동해바다에 지는 노을을 바라봅니다. 그건 노을이 아니라 서쪽에서 반사된 노을빛이겠지만 바다가 그 빛을 온전히 받아내니 너무 오묘해서 이 별이 과연 지구가 맞을까 의심이 듭니다.
오늘의 느낌을 내일 정리하면 내일의 시간과 맞물려 변형이 생기기 때문에 설악해변 바로 앞에 있는 작은 카페에 앉아서 여행기를 정리해 봅니다.
별 내용은 없지만 오늘 하루는 행복한 우연의 연속입니다.
고속도로 정체가 풀리는 순간에 고속도로에 진입했고, 잠을 깨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껌을 생각해 냈으며, 차박 자리를 욕심내지 않았는데 풍광이 아름다운 자리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제 차의 양 옆에는 아기를 키우는 가족들이 차박을 와 있습니다.
우리집 셋째 막내 곰이 생각납니다. 다음 주에 대천으로 가족 여행을 가기 때문에 미안하지는 않습니다.
엄마곰도 말 없이 흘려보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할 뿐입니다. 말 없이 하늘을 바라보고 말 없이 밥을 먹고 말 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나도 저 풍광의 일부가 되어 비슷한 색으로 물드는 기분입니다.
바다와 하늘을 바라보며 나의 색깔을 발견한다는 건 아이 셋 아줌마에게도 기분 좋은 일입니다.
아기곰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자기를 잃고 방황하는 순간이 오면.. 그 때는 바다와 하늘을 아무 말 없이 하염없이 바라보며 시간이 네 마음 위을 편하게 흐를 수 있게 하라고 이야기해 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