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장염 감기에 걸려서 말도 못하게 아팠습니다. 식은땀이 줄줄 나고, 링거 맞으러 간 병원 화장실에서 쓰러지고 ㅠ.ㅠ 결혼식을 앞두고 있다는 설레임 같은 건 날라가고, 저와 남편은 과연 결혼식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해야 했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쓰러지면 구급차가 와서 싣고 갈텐데 뭐가 걱정이야~'
여지없이 제 안에서 발동하는 4차원 사고가 저를 위로했고, 자신감 있게 버진로드를 걸어갔지요.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제 몸이 앞 뒤로 흔들려서 남편이 제 팔을 잡아야 했습니다~ 완전 민폐 덩어리 ㅠ.ㅠ
예식이 끝나자마자 인천국제공항으로 출발했는데 화장을 지우고 옷을 갈아입자마자 긴장이 풀려서 공항 라운지 의자에 수제비처럼 붙어 버렸습니다.
야간 비행을 하는데 저와 남편은 너무 지쳐서 대화조차 나눌 수 없었어요. 그렇게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에 도착하였습니다. 우리 둘은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뿌려진 붉은 장미꽃을 손바닥으로 쓸어버리고 짐도 풀지 못한 채 침대에 뻗어서 각자 깊은 잠을 청하였습니다.
휴양지 일정으로 수영과 각종 레저 프로그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도 이번에는 남들처럼 비키니 입고 해변가에서 고급 바베큐를 즐기며 유유자적 놀아야지 결심 또 결심하였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해변가에서 하루를 보내는데.. 저와 남편은 그 시간이 점점 질리기 시작합니다. 그 화려한 호텔과 각종 시설들, 휴양지의 인공적인 모든 것들이 끌리지 않는 겁니다. 호텔 휴양지가 화려할수록 우리의 뉴런들은 이곳을 탈출할 계획만 짜고 있습니다. 사실 휴식이 정말 필요했던 엄청 초췌한 우리는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결심을 합니다.
"키나발루산 트래킹을 시도해보자. 하다 힘들면 내려오지 뭐"
그렇게 우리는 휴양지의 고급 휴식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4100미터 키나발루산 트래킹을 시작합니다.
우리를 담당하신 현지 가이드분은
"아니, 신혼여행에 와서 저 산을 오르는 건 정말 아닌 거 같아요.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꾸세요. 제 가이드 역사상 신혼여행으로 키나발루 트래킹을 한 건 응급구조대 부부 한 커플 말고는 단 한번도 없었어요."
가이드의 진심어린 만류에도 불구하고 저와 남편은 결혼준비에 지친 몸과 마음으로 키나발루 산에 오릅니다.
저 때 얼마나 아팠는지 키나발루산의 아름다움 보다는 지옥의 형상을 닮은 모습만 자꾸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산이 무서운 얼굴을 보여주나보다~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냥 계속 올랐습니다.
하염없이 계속 올라야했던 키나발루산
키나발루산은 산 중턱에 마실 물이 많은 산으로 유명한데, 저희가 갔을 때는 가물어서 물이 없는 거예요. 물을 진짜 조금 갖고 갔는데 대략난감이죠 뭐. 제 자신에게 말을 건넵니다.
"언제든지 내려갈 수 있어! 넌, 자유야. 걱정하지마~ 대신 후회만 없도록 할 수 있는 곳까지 올라가봐.'
그렇게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 하루종일 걷다 보니 어느새 구름이 제 발 밑에 있더라고요.
키나발루산에서 바라본 풍광
키나발루 산에 오르며 바라본 풍경
저녁 늦게 키나발루산 정상 숙소에 도착합니다. 6인실을 배정받았는데, 한중일 세 부부를 묶어 놓았더라고요. 유럽사람들, 미국사람들끼리 모여서 춤과 노래가 한창인걸 보며 뭔가 기분 나빴지만, 중일 두 노부부는 침대에 딱 붙어서 휴대용 산소호흡기를 끼고 휴식중이고, 저는 또 식은땀을 흘리며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그렇게 4차원 신혼부부는 키나발루산 정상에서 신혼여행의 아침을 맞이하였습니다. 4100미터 고도의 산이 얼마나 추운지, 패딩을 2~3개 입어도 추위가 가시지 않아서 덜덜 떨어야 했습니다.
키나발루산에서 하산하고 우리는 어떻게 되었냐고요? 다리가 죽을만큼 아파서 눈물을 머금은채 침대에 각자 뻗고 잠을 청했죠. 그런데 산의 힘이었을까요ㅎㅎ그 다음날 갑자기 컨디션을 급 회복해서 휴양지의 모든 프로그램을 신나게 즐기다 왔습니다. 얼굴의 표정도 살아나고, 온 몸이 충전된 것처럼 에너자이저로 변신했어요. 먹깨비처럼 밥도 엄청 많이 먹고, 수영도 하루종일 했습니다~
4100미터 고산에 다녀와서 컨디션을 회복한 신부~
솔직히 신혼여행의 다른 일정은 거의 기억이 안납니다. 뭔가 재미있었다는 느낌만으로 남아 있네요.
어쩌면 키나발루산의 이미지 한 장 한 장이 제게 너무 강렬했나 봅니다. 짙은 검은 색의 바위들이 내려다보는 정상을 향해 걸어 올라가며, 인간의 지혜로는 가늠하지 못할 수천년의 시간을 한 걸음 한 걸음 만나는 기분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컨디션으로 산을 오른 건 위험한 선택이었지만, 함께 올라갈 인생의 종신친구와 부부로서 맞이한 첫 여행 기억으로 남기고 싶었나 봅니다.
어떤 여행은 목적지만 기억나고, 어떤 여행은 먹거리가 기억나고, 어떤 여행은 제 감정이 기억나고, 어떤 여행은 그 과정 전체가 남아 있습니다. 신혼여행으로 올라갔던 키나발루 산은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난 산 정상과 내 발밑의 구름떼가 강렬하게 남아 있습니다. 음흉하게 다음에 또 가려고 힘든 기억을 싹 지워버린 거겠죠~
산에 올라갈 때마다 저는 제 자신에게 이런 말을 많이 합니다.
"너는 자유다. 언제든지 내려갈 수 있다"
"너는 자유다."
내가 나에게 자유라는 걸 계속 알려주는 게 왜 제게 힘이 되는 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진심입니다. 산에 오르는 것도, 인생의 그 어떤 장면도 전부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