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밝은 숲 Dec 23. 2021

동생을 떠나보내며

슬픔 속에서 감사를 배우다


불행은 어느 날 갑자기 벼락같이 찾아온다. 아니, 몰려온다. 동생의 혈액암이 그랬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2년도 안 되었고 엄마를 떠나보내 드린 게 1년도 안 된 시점이었다. 한 마디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작년 초였다. 동생은 몸무게가 많이 빠졌다며 직장 동료들이 부러워한다고 웃으며 말했다. 근래 들어 피곤하다며 보약이라도 먹어야 되나, 해서 같이 한의원에 가 진맥을 하고 약도 지어먹었다. 갱년기 증상인 줄 알았다.


어느 날 제부한테 전화가 왔다. 동생이 림프종 4기라고... 지금 병원이라고...

이게 무슨 소린가 얼떨떨했지만 알아보니 동생이 진단받은 림프종은 5년 생존율이 65%였다. 우린 35라는 보이지 않는 불행 퍼센티지보다 65라는, 보이는 긍정적인 숫자에 의지했다. 희망을 가지고 동생은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그리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동생이 퇴원해서  집에 있을 때 나는 아침에 동생에게 전화해서 뭐가 먹고 싶은 지 물어보고 만들어 가져가곤 했다. 암 환자는 먹으면 살 수 있다는 것을, 먹어야 산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동생은 무조건 잘 먹어야 했다. 먹으면 살 수 있으니까. 먹어야 암세포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기니까.


생을 볼 때마다 내 가슴은 철렁, 내려앉다. 점점 말라 가는 몸과 퀭해지는 눈과 기운 없는 목소리에 가슴이 미어지는데 나는 씩씩한 척 식탁에 전복죽과 반찬을 차려놓고 동생에게 잠은 잘 잤는지, 어제저녁은 제부랑 잘 먹었는지, 많이 아프지는 않았는지, 아이들은 할머니 집에서 잘 지내는지, 일상처럼 하루의 안부를 물었다.


동생은  뼈만 남아 앙상해진 팔을 움직여 전복죽 한 숟가락을 그릇에 덜어 놓는다. 덜어 놓은 죽 한 숟가락을  알 떠서 입으로 가져간다. 항암 부작용으로 입 안은 헐어 있고 입술은 퉁퉁 시커멓게 부어 있다. 입에 떠 넣기도 힘들고 씹기도 힘들고 삼키기도 힘들어한다. 천히 조금씩  한 숟가락의 죽을 한 끼 식사로 간신히 먹는다. 동생집 문을 나서며 먹으려 애쓰고 있는 동생이 안쓰러워서, 먹고 싶은데 넘어가지 않는 동생이 가여워서 나는 울음을 삼켰다.


다음 날은 된장의 항암 작용이 동생에게 효과가 있기를 바라며 멸치와 소합살과 시금치의 영양이 동생의 몸에 기운을 북돋아 주기를 바라며 시금치 된장국을 끓여간다. 한 수저의 밥도 먹기 힘드니까 시금치 된장국 밥말아서 먹으면 조금 더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소망하면서...


동생집 냉장고에는 어제 만들어 놓은 전복죽과 반찬들이 그대로다. 배가 아파서 못 먹었다고 한다. 오늘 끓여간 된장국도 배가 아프면 먹을 수가 없다. 그런데 동생은 점점 배가 아픈 적이 많아지고 한 끼에 한 숟가락이 아니라 하루 종일 한 숟가락의 밥도 먹기 힘들게 되었다. 입 속이 다 헐어도 살려고 먹는다고 했는데, 배가 아프니 그마저도 못 먹었다. 입에서도 안 받고 뱃속에서도 안 받았다. 그렇게 동생은 하루하루 말라갔다


먹지 못하는 만큼 통증도 점점 심해졌다. 삼성병원에서는 힘드니까 이제 먼 병원까지 올 필요 없다는 말을 들었고 그래서 집에 있으면서 약으로 버텼는데 그것도 한계가 왔다. 어느 날 아침, 동생집에 가 보니 안방 침대가 설사 똥 범벅이었다. 기저귀를 차고 잤는데도 밤새 설사를 여러 번 한 흔적이었다. 입으로 뭔가를 먹으면 그게 다 설사가 되었다. 동생의 몸으로 영양이 하나도 공급되지 않고 있었다. 뱃속 기관들이 제 기능을 하나도 못 하고 있었다.


나는 동생을 살리고 싶었다. 그래서 병원에서 마지막 인사하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 무엇이든 먹을 걸 가져갔다. 죽을 못 먹으면 국물이라도 국물을 못 먹으면 효소라도 먹기를 바랐다. 췌장암으로 돌아가신 엄마가 마지막엔 물도 못 삼키고 돌아가신 것을 봤으니까, 나에겐 동생을 먹게 하는 일이 절실했다. 설사를 하더라도 먹으면 사니까  뱃속이 제 기능을 못 하더라도 먹을 수 있으면 사니까... 동생에게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면서...




동생은 8개월을 앓다가 올봄에 떠났다. 동생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저만치서 동생이 아프기 전 모습으로 활짝 웃으면서 걸어올 것만 같다.


아버지, 엄마, 동생까지 세 명의 혈육을 연이어 떠나보내면서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

나도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았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하루하루 살아 숨 쉬고 있는 순간순간이 너무도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상이 당연한 게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유한한 생명체인데 지금 이 순간,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감사하게 느껴졌다. 아침에 눈 뜰 수 있어서 감사했다. 잘 먹고 잘 소화시키고 잘 배설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일상이 기적이고 축복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어서 감사했다. 동생을 보내고 나서야 나는 일상이 감사임을 알았. 지독한 대가를 치르고 깨닫게 된 감사다. 그래서 나의 감사는 슬프다. 슬픔 속에서 감사하고 감사함 속에서 슬프다.


동생이 그리워질 때마다 더 이상 볼 수 없는 동생을 잃은 상실감이 함께 찾아온다. 먼저 간 이를 그리워하는 것은 남아 있는 자가 감당해야 할 몫일 텐데 난 그저 안타깝고 서글프다.


밥을 차려주고 설거지하고 동생 집 문을 나서는 나를 보면서 동생은 고맙다고 말했다. 기운 없어서 말 한마디 하기도 어려울 텐데... 아픈 와중에 고맙다는 말을 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동생에게 못다 한 말을 하고 싶은가 보다.


"소연아, 네가 아프기 전에 더 많은 시간 함께 보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미안해. 아프기 전에 아프지 않도록 좀 더 보듬어줬어야 했는데 그걸 몰라서 미안해.. 아픈 와중에 힘도 없는데 나에게 고맙다는 말 해 줘서 고마워... 안 먹히고 못 먹을 상황에서도 먹으려고 애써줘서 고마워.  지막까지 살려고 노력해줘서 고마워..."


'




이전 05화 고흐의 영혼이 그린 <감자 먹는 사람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