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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은 숲 Mar 22. 2022

엄마의 영양빵

봄비가 내려서

봄비가 내리고 비를 머금은 대지는 어머니가 된다. 물 오른 나무들은 천천히 기지개를 켜며 연두색 잎들을 피울 것이고 어느 집 담장에서는 노란색 개나리가 봄산에서는 연분홍빛 진달래가 피어날 것이다.




어린 시절, 엄마는 우리 오 남매에게 간식으로 영양빵을 만들어 주셨다. 밀가루에 계란을 넣고 약간의 설탕과 소금을 넣고 반죽을 하고 어린 우리가 씹기 좋은 크기로 당근을 썰어 넣고 완두콩을 넣어 찜통에 찌어 내오셨다.


방금 쪄 내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영양빵은 얼마나 먹음직스러워 보였는지... 연노랑빛을 띠는 둥글게 커다란 빵 위에 점점이 박혀 있는 주황색 당근과 초록빛 완두콩은 얼마나 예뻤는지... 사십 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손이 큰 엄마는 오 남매가 부족하지 않도록 언제나 크게 많이 만드셨는데 찜통에서 방금 쪄낸 영양빵은 지금은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엄마의 전매특허였다.


영양빵뿐만 아니라 엄마는 타래과도 자주 만들어 주셨다. 타래과는 밀가루 반죽을 얇게 밀어 칼집을 내고 모양내어 튀겨낸 과자인데 달고 바삭한 맛이 일품이었다. 오 남매를 먹이는 일이 중요해서였을까, 엄마는 항상 무언가를 만드셨고 덕분에  어린 시절 우리의 먹거리는 풍요로웠다.




세월이 흘러 고향을 떠나 고등학교를 다니고 대학을 다니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며 서울살이를 했던 나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엄마에게 아이를 맡기고 일을 해야 해서였다.


할머니가 된 엄마는 손녀에게도 간식으로 타래과를 해 주시고 도넛을 만들어 주셨다. 내가 일하러 간 사이에 어린 딸은 할머니와 얇게 밀어진 밀가루에 도넛 모양을 찍거나 직사각형 모양 밀가루에 칼집을 내 타래과를 만들어 먹고 놀았을 것이다.


엄마는 영양빵을 만들거나 타래과를 만들거나 도넛을 만들거나 하는 일들을 즐겨하셨다. 무언가를 당신의 손으로 만들어 자식들 입으로 들어가는 일의 기쁨을 즐기셨던 것 같다.


그런데 자식들이 다 커서 결혼해 집을 나가고 손녀도 커서 할머니 집에 올 일이 거의 없어져서였을까, 엄마는 언제부터인가 영양빵도 타래과도 도넛도 만들지 않으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일주일 되는 날, 엄마는 췌장암 진단을 받으셨다. 의사는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가 보라는 얘기를 했다. 그리고 며칠 후 혼자 찾아간 나에게 의사 선생님은 엄마의 생명이 6개월에서 1년 정도일 거라는 얘기를 했다.


오후였던 시간이 갑자기 깜깜해졌고 세상이 저만치 물러나 있는 것 같았다. 귀로 들은 말의 막막함 때문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엄마는 멀쩡했고 아픈 적이 없었고 그저 계단 올라갈 때 숨이 찰 뿐이었다. 그런데 췌장암 4기고 폐 전이라고 한다. 운전하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폭풍같이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모든 일상을 중단하고 엄마의 암 치료에 집중했다. 혼자 지내는 엄마를 위해서 끼니를 같이 챙겨 먹었다.


엄마가 암 진단을 받기 전, 나는 엄마에게 내 손으로 밥상을 차려드린 일이 없었다. 매달 용돈 드리는 걸로 면죄부를 삼았고 엄마 집에서 엄마가 밥상 차리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우리 집에 초대해 밥을 해 드린 적도 없었다. 항상 일이 바쁘고 몸이 자주 아프다는 핑계가 먼저였고 무엇보다도 음식 만들기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거나 무지했다.


그러던 내가 음식에 대해 절실해졌다. 암에 걸린 엄마에게 항암에 좋은 음식을 찾아서 만들어 드리고 싶었다. 항암 치료에 점점 입맛이 없어져 가는 엄마가 조금이라도 더 드실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꼬막을 좋아하는 엄마에게 꼬막 삶는 법을 배워서 꼬막을 삶았고 생선 요리를 좋아하는 엄마에게 뭘 넣어야 할지 물어봐 아귀탕을 만들어 먹었다. 암에 걸린 엄마가 좀 더 잘 드실 수 있도록 남편과 나는 매일 엄마 집에 가서 밥을 먹었다. 브로콜리를 데치고 순두부찌개를 끓여서 엄마와 함께 점심을 먹고 저녁을 먹었다.


내 어린 시절 엄마가 자식들이 성장하도록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셨듯이 오십이 넘어서야 나는 아픈 엄마에게 내 손으로 끼니를 해 드렸다. 일흔다섯 해를 살고 있던 엄마가 십 년만 더 아니, 오 년만이라도 더 우리들 옆에 계시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찌개를 끓이고 국을 만들고 나물을 무치곤 했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이제 2년 조금 지났을 뿐인데 췌장암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슬프다. 점점 심해지는 몸의 통증으로 괴로워하는 엄마를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 기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항암 치료의 후유증과 암이 주는 통증을 고통스게 참다가 점점 센 진통제를 늘려갈 수밖에 없었 엄마의 아픈 얼굴이 떠올라서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한편으로 췌장암 진단을 받고도 밥상 앞에 앉아 맛있게 먹고 웃고 이야기도 하며 보냈던, 겨울과 봄과 여름과 가을 동안 엄마와 함께 했던 밥상을 추억한다.


얼마 남지 않은 엄마의 일상을 함께 하고자 외국에 사는 두 동생들이 들어와 처음으로 오남매가 엄마와 함께 다녀왔던 경주 여행을 억한다.


봄비가 내리는 흐린 하늘을 바라보면서 내 어린 시절, 엄마가 만들어 주셨던 주홍빛 당근과 초록빛 완두콩이 선명했던 영양빵을 떠올린다.


엄마가 가족들에게  영양빵을 만들어 먹이고 밥상을 차려 주셨듯이 나도 박대를 조리거나 미역국을 끓이거나 섞박지를 담아서 남편과 딸과 함께 먹는다. 가장이라는 무게를 기꺼이 짊어지고 최일선에서 밥벌이에 애쓰고 있는 남편을 위해, 한 발 한 발 내딛듯 쌓이는 공부를 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딸을 위해, 그리고 음식이 우주가 될 수 있다는 걸 엄마를 통해 배운 나를 위해 밥상을 만든다.


봄비가 대지에 촉촉이 젖어 들어 생명을 꽃피우듯이 내가 만들어 먹는 음식이 우리 가족에게 건강이 되고 좋은 에너지가 되어 삶으로 꽃 피울 수 있기를 바라면서 봄비 내리는 봄날, 세상에 계시지 않아 더 이상 만날 수 없고 볼 수 없는 엄마를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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