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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은 숲 Jan 17. 2022

아빠의 포목점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혹은  한 인간이라는 존재로

이렇게 차가운 칼바람이 얼굴을 때리고 귀를 빨갛게 물들이는 겨울날에는 어김없이 아빠가 떠오른다.

겨울이 되면 아빠의 얼굴은 바알갛게 얼어있는 날이 많았다. 외풍이 심한 가게에 하루 종일 앉아 있으니 손이 시리고 발은 차가워지고 얼굴은 빨갛게 얼음이 들곤 했다. 그러면 잠깐씩 아빠는 가게와 이어져 있는 방으로 들어오신다. 어린 우리가 덮고 있는 담요 안으로 들어오는 아빠 몸은 한기로 가득했다. 겨울마다 아빠의 얼굴은 동장군 꽃이 빨갛게 피어서 가실 줄 몰랐다.


나는 언젠가부터 그런 아빠가 안쓰러웠.

그래서 아빠한테 추운데 방에 계시라고 말하면 가게에 주인이 없으면 손님이 쳐다보고 그냥 간다고 말씀하시며 몸을 잠깐 녹이고 다시 추운 가게로 나가시곤 했다. 아빠가 어디로든 도망치지 않고 피하지도 않고 추위를 견디며 가게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우리 오 남매가 먹고 배우고 자랐다는 것이 새삼 감사하다.

아빠이고 부모이기 때문에 가게를 지켜온 것이 당연했다고 말하기에는 45년이라는 시간 동안 아빠의 고가 너무 크게 느껴져 마음 아프다.

80년대 가게 모습(가게에 앉아 계시는 아빠와 엄마)

아빠는 첫째인 내가 돌이 지난 1968년에 아빠 고향과 가까운 이곳으로 이사 와서 치매가 심해지기 전까지 45년 동안 포목점을 운영하셨다.

지금은 사라진 내 기억 속 30여 평 가게는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 진분홍, 연초록, 빨강, 파랑, 노랑 등 여자  한복감이 오색찬란하게 가게 정면에 장식품처럼 걸려 있었고 오른쪽 벽에는 포근한 솜이 잔뜩 들어간 화려한 색감의 이불과 요가 세트로 진열되어 있었다. 왼쪽으로는 형형색색 다양한 무늬와 패턴을 가진 스펀지 요와 폭신한 베개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제는 찾는 사람이 없어져 지나간 시대의 유물이 되어 버린 소창, 노란 광목과 하얀색 옥양목, 한복과 마고자 감으로 쓰이던  양단과 공단, 갑사와  깨끼, 다후다와 같은 천들이 가게 한 편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박제된 꿩 한 마리가 긴 꼬리를 추켜 세운 모습으로 화려하게 혹은 고급스럽게 가게를 장식하고 있던 모습이 지금도 그려진.


70년대 가게 모습(30대인 아빠와 쌍둥이 동생 태어나기 전 우리 세 자매)


1960년대와 70년대까지만 해도 결혼식 때  한복은 신랑 신부뿐만 아니라 가족 친척들까지 웬만한 집에서는 맞춰 입었고 이불과 요도 맞춰해 가는 풍습이 있었다. 그래서 포목점은 호황을 누렸고 덕분에 70년대 나의 어린 시절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다. 그러나 8,90년대 들어서면서 한복은 수요가 줄었 아기 기저귀는 소창으로 만들어  빨아 쓰는 게 아니라 슈퍼에서 구입해 일회용으로 쓰고 버리는 시대가 되어 포목점은 점점 사양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


아빠는 새벽같이 일어나 등산을 다녀오고 아침 먹기 전 가게 문부터 열어 놓고 하루를 시작하셨다. 손님이 없을 때는 항상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아서 클래식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었다. 덕분에 관상도 볼 줄 아셨고 <동의보감>을 읽고 한약도 지어서 달여 먹곤 하셨다.

자식들에게 밥상머리 교육을 엄하게 하셨고 엄격함을 넘어 독단적이셨다. 자식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줄 몰라 아빠 방식으로 가르침을 준 것이었을  텐데 어린 오 남매뿐 아니라 엄마에게도 아빠는 냉정하고 매서운 분이셨다.


아빠는 평소에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 술자리에서 누군가 권해도 매몰차게 거절하는 분이었다. 그런데 발동이 걸리면(엄마가 쓰던 표현이다)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쉬지 않고 마셨다. 집에서는 잠만 자고 나가 돌아다니며 술을 드셨다. 그 이유로 엄마와 냉전일 때가 많았고 집 안 분위기는 살벌해지곤 했.


나도 나이를 먹고 아빠를 아빠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왜 그렇게까지 술을 드셨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어릴 때 일찍 여읜 당신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을까.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욕을 먹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남들의 놀림과 무시를 당하고 싶지 않아 항상 경계하고 긴장하며 살아온 탓이었을까. 

가난한 홀어머니 곁을 떠나 부유한 작은 집에서 자라면서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웠지만 정서적으로 불안정해서 생길 수밖에 없는 외로움과 결핍감 때문이었을까.

결혼한 이 어깨에 얹어진 가장이라는 무거움 다섯 아이는 점점 커 가는데 가게가 점점  쇠락해가고 있는 경제적인 현실에 대한 무력감 때문이었을까.

대학 시절 광화문 앞에서 겪은 4.19 혁명이 미완으로 끝나 군부 독재가 장기 집권으로 언제 끝날 줄 모르게 되어 요원해진 민주주의에 대한 바람과 정치적 시국에 대한 절망감 때문이었을까.

젊은 시절 경제적인 능력을 배경으로 큰소리치고 사시다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점 작아지고 줄어드는 당신의 입지 때문이었을까.  

두 아들 가족이 멀리 이민을 떠나서 얼굴 보고 살기도 힘들고 고생하며 살고 있는 것도 눈에 밟혀서였을까.

가족 여행을 와서도 편안하게 하룻밤을 놀거나 쉬면서 보내지 못하고 가게 문 열어야 한다고 가게 비워 두면 안 된다고 항상 먼저 혼자 길을 나서야만 했던 책임감강박증 때문이었을까


그런 것들이 모두 모여 아빠에게 스트레스가 되고 불안이 되고 염려가 되고... 그래서 아빠는 그것들을 어디에다 어떻게  풀어놓아야 지 알지 못해서 술을 마시고 또 마시고 몇 날 며칠을 머릿속이 텅 빌 때까지 그리고 기운이 다 소진될 때까지 마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방식으로 삶을 버텨냈는지도 모.

아빠의 일상을 살아내기 위해서, 가게를 지키기 위해서, 일곱 식구를 책임지기 위해서.


돌아가신 아빠를 억하노라면 술 마시고 비틀거리던 모습이 아니라 추운 겨울  빨갛게 얼어 있던 얼굴이 먼저 떠오른다. 그래서 내가 힘들었던 기억보다 아빠가 힘들었을 기억 때문에 미안하고 다. 


날이 추워서 추운 겨울날이어서 잠시 몸을 녹이기 위해 미닫이문을 드르륵 열고 빨갛게 언 얼굴로 오 남매가 모여있는 방으로 들어서는 아빠의 얼굴이 기억 저편에서 떠오르는 겨울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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