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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은 숲 Jan 04. 2022

어제를 위로하는 법

치유하는 그림 그리기

4년 전인가 지인이 주민센터에 색연필화 프로그램이 생겼다고 같이 다니자 권하셨다, 학교 다닐 때 외에는 그림 배울 기회가 없었는데 재미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씩 색연필화를 배우러 다녔다.


<보타니컬 아트 컬러링북>이라 쓰여 있는 책을 받고 선 연습, 면 연습부터 시작했다. 오랜만에 무언가를 배우러 다니니 즐거웠다. 한 색부터 진한 색까지 면을 칠해 가는 과정에서 색의 혼합으로 만들어지는 감이  모두 다 달라서 신기했다. 어떤 색을 얼마나 많이 쓰고 적게 쓰느냐에 따라서 혹은 색을 칠하는 필력의 세기에 따라서 색채감이 달랐다. 새롭게 알게 된 색들의 향연이었다. 


수채 색연필화


수채 색연필로 만들어지는 꽃의 질감도 재미있었다. 진한 색과 연한 색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명암이 생겨나 질감이 생겼다. 왼쪽에 인쇄된 꽃을 보고 오른쪽에 있는 꽃 스케치에 색을 입히면 예쁜 꽃이 완성되었다. 새로운 세상이었다.  오로지 색과 면에만 집중해서 탄생되는 꽃 한 송이, 잎사귀 하나는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내가 만든 꽃 한 송이였다. 성취감이 느껴졌다. 그렇게 플라워 편, 사계절 편, 부케 편을 끝내갔다.


엄마가 췌장암이라는 얘기를 듣고는 더 이상 다닐 수가 없었다. 혼자 있는 엄마를 돌봐야 했고 사람들과 모여서 그림을 그리고 안부를 묻고 하는 일상이 그 당시 내게는 딴 세상 일처럼 느껴졌다. 엄마는 항암 치료를 위해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입원해서 병원에 있는 동안에는 딴 세상이었지만  퇴원해서 집에 있는 동안에는 남들처럼 밥 해 먹고 과일도 먹고 가끔씩 외식도 하고 밤이 되면 잠을 자는 일상을 살았다.


남들과 같은 일상을 사는데 불안했다. 엄마를 보면 슬프고 안타까웠다. 이번 항암은 잘 들어야 할 텐데, 엄마가 많이 아프지 않아야 할 텐데,  제발 좋아져야 할 텐데... 마음이 힘들었다. 이 불안감과 걱정과 슬픔을 잊기 위해서 뭐라도 해야 했다.


그래서 혼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인터넷을 검색해서 캔버스와 아크릴 물감, 붓이 들어있고 스케치도 프린트되어 있는  그림 그리기 DIY를 구입했다. 캔버스에 프린트된 번호와 물감 뚜껑에 붙은 번호를 맞춰 아크릴 물감을 칠하면 되는 거였다.


엄마 집에서 돌아와 마음이 힘들 때 나는 캔버스에 색을 입혔다. 물감칠하는 동안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색과 면만 바라보고 있으면 되었다. 불안감도 잊고 두려움도 잊고 걱정도 잊고 슬픔도 잊을 수 있었다. 오직 세상에는 캔버스와 붓과 다양한 색들과 칠하는 손과 보는 눈만 있을 뿐이었다.


머리가 텅 비어지는 느낌, 극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고흐의 <밤의 카페 테라스> 아크릴화


색을 칠하다 보면 어느새 빨간색들은 꽃이 되어 있고 파란색들은 밤하늘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정물화와 풍경화를 완성해 갔다. 내가 좋아하는 고흐 그림도 여러 점 색을 입혔다. 색칠해진 그림을 보면 다 끝냈다는 성취감과 아름다운 색의 조화가 뿌듯함을 주기도 했다.



엄마께 선물했던 정물화 그림


처음 그린 정물화는 암 투병 중인 엄마께 선물했다. 환하게 밝은 그림처럼 엄마도 치유되길 소망하면서... 엄마는 내가 그린 그림을 눈에 제일 잘 띄는 거실 벽에 걸어 놓으셨다. 집 안이 훤해졌다고 하면서...


엄마는 이제 세상에 안 계시고 엄마께 선물했던 정물화는 다시 게로 왔다. 그 그림은 엄마 집에서 함께 밥 해 먹고 얘기하곤 했던 일상의 기억부터 아파서 힘들어하던 그리고 통증을 참아내려 애쓰던 엄마 모습까지 11개월 동안의 암 투병 생활을 모두 불러낸다. 그래서 안타깝고 슬프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엄마와 함께 한 시간들이 많아서 다행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빨간 꽃이 화사한 정물화가 내게는 엄마와의 추억이 담긴 그림으로 기억될 거다.



요즘에는 동네 서관에  때마다 그림 그리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을 한두 권씩 꼭 섞어서 가져오게 된다. 드로잉 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 수채화 그리는 법, 아크릴화 그리는 법, 오일 파스텔화 그리는 법, 마카펜으로 그리는 법까지 나는 다양하게 이것저것 빌려온다.


수채화
오일파스텔화


그리고는 마음 내킬 때  따라 그려 본다. 책에서 하라는 대로 색을 섞거나 물감을 칠하는데 책에 실린 그림처럼 그려지지 않는다. 실망스럽. 하지만 기어 다니지도 못하는데 달리기 하려는 내가 잠깐 우스워진다. 괜한 욕심을 내고 있구나, 많은 것을 바라고 있구나, 깨닫는다.


그저 지금 이 순간 마음을 내려놓고자 그리는 건데 금방 또 욕심이 들어가는 걸 또 다른 내가 바라본다.

아무런 목적 없이 그리는 과정을 즐기면 되는 걸,.. 그래서 나는, 지금의 나는 그냥 오늘을 그린다.


머리를 텅 비우고 싶을 때 그림을 그린다.
마음의 평화가 깨지려 할 때도 그림을 그려 본다.

신경이 긴장해 있을 때 그림을 그린다.

그리는 순간에는 그리려 하는 대상에만 몰두하면서 다른 것은 잊으려 한다.


여행지에서 사 온 엽서를 보고 그리며  그곳의 풍경과  그곳에서 지낸 시간들을 다시 한번 추억하기도 한다.

고단했던 나를 내려놓고 어제를 위로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그렇게 그림은 오늘의 나를 치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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