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테뉴가 쓴 <에세 2>를 읽는데 일주일이 걸렸다. 2권은 1권보다 분량도 많은 데다가 저자의 철학적 기반이 서술되어 있어서 행간 사이의 의미를 찾아 음미하면서 읽어나갔고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은 적어가면서 천천히 산책하듯 읽었다.
몽테뉴는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극도로 잔인한 시대라고 평가한다. 그는 1533년에 태어나 1592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한창 활동하던 시기, 그러니까 1562년부터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프랑스에서는 내전이 지속되었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 알고 있는 위그노 전쟁이다. 그들은 구교도와 신교도로 나누어져 서로가 서로를 해쳤는데, 고대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극도의 잔혹성을 날마다 겪고 있다고 몽테뉴는 쓰고 있다. 그들은 단지 죽이는 재미로 살인을 행하고 전에 없던 고문과 새로운 살인법을 만들어 내는 괴물 같은 마음씨를 가지고 있다고 몽테뉴는 말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1994년에 개봉되었던 영화 <여왕 마고>가 떠올랐다. 영화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을 끔찍할 정도로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구교도와 신교도 간 전쟁이 10년째 계속되던 중에 1572년 양측은 평화와 화해를 위해서 구교도인 카트린 드 메디치의 딸이자 샤를 9세의 여동생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 신교도인 나바르 왕 앙리의 결혼을 추진한다.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신교도들이 파리로 몰려든 그 시점에서 구교도들은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밤에 치밀한 계획하에 신교도들에 대한 학살을 시작한다. 영향력 있는 신교도들을 먼저 죽이고 뒤이어 모든 신교도가 그 대상이 되어 죽임을 당한다.
이자벨 아자니가 연기했던 그날의 신부, 여왕 마고(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의 빨간 피로 물든 하얀 드레스와 넋이 나간 표정, 거리 곳곳에 살육 당해 칼에 베이고 피에 물든 시체들이 겹겹이 쌓여 있던 참혹한 장면들이 아직도 기억난다. 파리에서 시작된 살육은 지방으로까지 퍼져 수만 명의 신교도들이 희생당했다고 역사는 전한다.
자식이나 부모, 친구나 동료를 잃은 사람들은 분노감에 휩싸여 똑같이 아니 더 잔인하고 끔찍한 방법으로 복수를 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신교도는 구교도에게, 구교도는 신교도에게 분노심과 복수, 하느님과 종교라는 이름으로 서로가 서로를 고문하고 죽이고 나중에는 무엇 때문에 죽이는지도 모르게 몽테뉴의 말대로 단지 재미 삼아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시대가 참혹해서 누가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니 가진 게 많은 귀족들은 자신의 저택이나 성을 무장한 병사들로 지키도록 하는 게 그 시대에는 일반적이었다. 그런 시대에 몽테뉴는 무장한 집들 사이에서 내 집의 보호를 하늘에 맡겼다고 쓴다. 아무리 쳘벽같이 무장한 병사들을 세워 놓아도 분에 휩싸여 이성을 잃은 자들이 몰려오면 소용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는 운명을 하늘에 맡김으로써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삶의 끝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어 어떠한 죽음의 형태도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을 먹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몽테뉴는 말한다, 책을 통해 구하는 것은 자신을 알게 해 주는 지식과 잘 죽고 잘 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500년 전 시대의 죽음은 현대인의 죽음보다 훨씬 더 가까이 있었다. 언제 어떻게 누구의 손에 죽을지 모르는 극도의 위험하고 잔인한 전쟁의 시대인 탓도 있지만 몽테뉴 자신도 위로 두 형을 잃어서 첫째가 되었고 자신의 두 아이도 젖먹이 때 잃어서 딸 하나만 장성했을 정도로 형제와 자식의 이른 죽음이 일상인 시대였다. 그러하더라도 개인의 죽음은 언제나 새삼스럽고 언제나 받아들이기 힘든데 그 마음과 그 주제에 대한 성찰이 철학하는 삶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철학하는 삶이란 살아가는 길의 맨 끝에 있는 죽음을 고찰해 잘 죽고 잘 사는 길에 대한 생각일 것이다.
몽테뉴는 12장 ‘레몽 스봉을 위한 변호’에서 자신이 살아오면서 읽고 배우고 사색했던 철학의 다양한 모습을 펼쳐 놓는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인간과 자연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영혼의 움직임이 어떠한 지, 이성의 작용은 어떠한 지, 감각이 앎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떤 작용을 하는지에 대해 나열하고 비교하고 평가한다.
282쪽에 달하는 그의 철학 수업은 지난 시대 철학의 역사와 다양한 의견들에 대한 앎을 제공한다. 앎에 대한 정의와 관점에 대해 많은 철학자들을 인용하고 나서 몽테뉴가 내린 결론은 앎에 대한 우리의 오만과 자만에 대한 경계이다.
성경에는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선악과를 먹으면서 지식과 분별력이 생겨난 것인데 지식과 분별력으로 인해 우리는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고 분별할 줄 알게 되면서 오만함이 자리잡게 되었을 것이다. 몽테뉴는 오만이 인류의 파멸과 부패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오만함은 나와 남을 비교해서 나를 우위에 두고 남을 인정하지 않는 마음의 움직임이기에 배척하고 편가르고 적을 만들고 싸움을 하고 심지어 전쟁을 하게 만든다는 의미에서 나는 그의 생각에 동의한다. 나와 남을 구별짓고 나의 우월을 앞세워 내 주장과 행동을 관철시키려는 마음보다는 서로 이해하고 연대하고 사물과 사람에 대해 대등하게 보고 생각하는 것이 나를 평화롭게 하고 나아가 세상을 좀더 살기 좋게 만드는 첫걸음이 아닌가, 라는 생각도 한다.
몽테뉴는 황제의 영혼이나 구두 수선공의 영혼이나 같은 틀에 부어 만들어졌다고 본다. 배운 거 없고 아는 게 없어도 현명하거나 행복하게 사는 장인이나 농부들이 많고 무식하지만 행동과 처신이 탁월한 사람들이 많다는 예를 든다. 그러니 지식이나 앎이 선량하거나 행복하거나 현명한 삶을 살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 행복한 삶이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몽테뉴가 답하는 지고의 행복은 영혼과 육체의 평안이다.
이 세상에 와서 이제 살아갈 날들이 살아온 날들보다 적어진 지금의 나에게 행복은 감사하는 마음에서 오는 것 같다. 예전에는 당연하다고 생각되었던 일상이 지금의 나에게는 감사로 다가온다. 예를 들면, 잘 자고 아침에 눈 뜨는 일, 잘 먹고 잘 누는 일, 잘 숨 쉬고 잘 걸어다니는 일 같은 것들 말이다.
마음에 감사가 차오르면 영혼이 충만해지면서 마음은 평화로운 상태가 된다. 마음의 평온은 몸의 부대낌을 최소화하고 자주 아프던 몸이 가끔씩만 삐걱거리게 되니 몸의 평안도 가져다 준다. 몸과 마음이 평온해지면 주변 사람들에게 관대해지고 마음은 너그러워진다. 세상이 이전보다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보인다. 계절의 흐름이 더 가까이 와 닿는다. 자연이 주는 비와 바람과 햇볕이 마냥 새롭게 느껴진다. 그래서 몸과 마음의 평화로운 상태가 행복이라는 몽테뉴의 정의에 나는 깊이 공감한다.
그러나 언제나 일상이 감사한 것은 아니어서 감사가 사라진 자리에는 어느 새 불안이나 걱정, 우울이나 화 같은 불편한 감정이 들어와 앉는다. 감사하는 삶을 시샘이라도 하듯 시시때때로 들어오는 이 예민하고도 불편한 감정의 기류들 속에서 항상 감사를 품고 사는 일이 마냥 쉽지만은 않다.
행복한 삶이란 지금 생에서 천국이나 극락을 사는 것일 텐데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자연스러움과 순수함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행복한 삶은 그냥 주어지지는 않는 것 같다. 불안함을 뚫고 나가야 마음에 평화가 오고, 걱정과 근심을 내려놓아야 감사가 찾아오고, 분노와 화를 버려야 영혼에 평강을 얻을 수 있으니 말이다.
결국 행복한 삶을 살려면 끊임없이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고 수양하면서 살아야 하나 보다. 자신을 들여다 보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의미있고 충만한 삶이 아닌가, 몽테뉴의 <에세> 2를 읽고 쓰며 그런 생각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