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에 나는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낸 이문구의 연작소설집 <관촌수필>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총 여덟 편의 이야기를 한 편씩 읽고 글을 쓰다 보니 태양이 뜨겁게 빛나는 계절이 다가왔다.
<관촌수필>에서 묘사하는 관촌 마을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인데 나는 관촌마을의 아파트에서 계절에 따라 변해가는 간사지 논이 있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작가의 어린 시절 놀이터였던 개펄이 간사지 논으로 개간되어 이른 봄의 빈 들판과 무논을 거쳐 지금은 모내기를 끝낸 어린 벼들이 뜨거운 태양볕에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란다.
간사지 논 중간쯤에는 새로 난 철로가 논을 가로지른다. 작가의 어린 시절이었던 1940년대 관촌마을 사람들에게 기차는 신문물일 뿐 아니라 동경의 대상이어서 기차가 지나갈 때쯤이면 어른들은 일하다 말고 아이들은 놀다 말고 기차를 바라보며 환호성을 지르거나 손을 흔들며 반가워하곤 했다고 작가는 쓴다. 그때의 기찻길은 사라졌고 도시 확장으로 기차역이 멀찌감치 이사 가서 기찻길 역시 새로 민들어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기찻길 너머 바다와 내가 만나는 지점쯤에는 서해안 고속도로가 가로지른다. 계곡에서 흘러 내려온 물들이 내가 되어 흐르다가 바다와 만나 밀물이 되고 썰물이 되어 서로 뒤척이고 섞이면서 바다로 떠내려간다.
서해안 고속도로 저 너머에는 바다가 있다. 날이 화창하고 미세먼지가 없는 날, 바다는 쪽빛으로 빛난다. 멀리서 바다는 잔잔하고 멀어서 바다는 가 닿을 수 없는 꿈이 된다.
소설 속에서 1940년대에 ’행운유수'의 주인공 옹점이는 동네에서 가까운 개펄에 나가 열무를 씻었고, '녹수청산'의 주인공 대복이와 어린아이였던 작가는 바다에 빠진 여우를 잡으러 안개 낀 새벽 개펄에 나가곤 했다. 그런 동네 개펄이 논으로 바뀔 무렵 '여요주서'의 주인공 신용모는 제대로 된 보상도 받지 못하고 집이 헐리고 논과 밭이 쪼개져 산골마을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개펄이었던 간사지 논을 바라보니 70여 년 전 소설 속 인물들이 저기 어디쯤에서 고둥과 게를 잡거나 김칫거리를 씻거나 쫓겨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그려진다.
아파트 앞쪽 왼편으로는 작가의 생가터가 보이는데 첫 번째 이야기인 '일락서산'에서 할아버지의 묘가 있던 칠성바위도 작가가 살던 허우대 좋던 집도 지금은 모두 사라졌다. 다만 작가의 생가터 부근에 버려진 우물만 옛 시절을 증언하듯 덩그러니 남아있다.
<관촌수필>이 쓰여진 1970년대 여덟 편의 이야기 주인공들은 모두 관촌마을에 살았거나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일까, 다 읽고 난 뒤 관촌마을을 바라보는 내 눈에는 '공산토월'에 나오는 석공이 죽은 후에도 아이들을 건사하며 삶을 살아냈을 정희 엄마가 그리고 '관산추정'의 유복산이 아직도 마을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만 같다. 지금은 여든이 넘은 어르신이 되어 옛이야기를 하며 먼저 간 이들을 그리워하고 험난했던 지난 일들을 되새기고 있을 것만 같다.
이문구의 <관촌수필>은 1972년부터 6년에 걸쳐 쓰여져 1977년 12월에 초판이 발행된 연작소설집이다. 1941년에 태어나 2003년 별세한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와 동네 사람들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작가의 고향인 충남 보령의 관촌마을이 그 주인공이기도 하다.
소설 <관촌수필>의 가장 큰 특징은 맛깔스러운 충청도 방언의 구사에 있다. 양반을 대표하는 할아버지가 구사하던 한자어가 많은 입말과 동네 사람들이 구사하는 입말을 그대로 재현해 때론 의뭉스럽고 때론 구수하고 때론 찰진 토속어의 대화글은 읽는 재미를 더한다. 또한 옹점이가 사복형사를 상대로 사용한 비속어는 상황에 대한 찰떡같이 적절한 비유의 역할까지 겸해 독자에게 읽는 재미를 선사한다.
작가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에게 천자문과 동몽선습 등을 깨쳐 한자어가 능숙한 세대이다. 그래서 한자보다 한글에 익숙한 우리 세대나 한자보다는 영어가 더 익숙한 이후의 세대에게 <관촌수필>은 읽어나가기 까다로운 책이 된 듯하다. 시대적 조류와 변화에 의해 어려운 책이 되어 버렸지만 다르게 해석하면 그만큼 지난 시대의 문화와 풍조가 담겨 있다는 뜻이므로 한국문학이라는 큰 흐름에서 보았을 때 더 의미 있는 작품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문구 작가는 1941년에 태어났으니 일제 강점기와 8.15 해방, 해방 후 좌우의 이데올로기 대립, 한국전쟁, 전통을 외면한 서양 문물의 유입으로 인한 근대화와 경제 성장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유신 독재 시대를 살면서 이 이야기들을 썼다. 그래서 <관촌수필>에는 작가가 경험한 시대의 조류가 섞여 전통과 근대화, 보수와 진보 같은 우리 역사 속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시대적 아픔이 녹아들어 있다.
작가의 자전적 경험이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치열하고 험난한 일들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소설 속에서 나오는 사건들 자체가 우리의 지난한 현대사를 대변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관촌수필>은 충남 보령의 관촌마을이라는 조그만 시골에서 일어난 사건들, 시골 사람들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고 평범하게 살아간 사람들의 삶이 사건이 되고 역사가 되고 문학이 됨을 보여준다.
<관촌수필> 여덟 개의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은 모두가 하나같이 변두리의 삶을 살아가거나 손해 보거나 억울하거나 힘들게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남이 안 가진 비범한 능력을 갖고 있거나 잘 났거나 특별한 주인공은 없다.
‘일락서산’에서 할아버지는 망해가는 양반 계급의 끄트머리를 간신히 쥐고 있다가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좌익의 지도자로 활동하다 돌아가셨다. ‘화무십일’의 윤 영감은 아들을 잃고 손자를 찾아 늙은 몸으로 천 리 길을 떠났고 ‘행운유수’의 정 많고 의리 있는 옹점이는 전쟁으로 남편 잃고 끈 떨어진 신세가 되어 장돌뱅이 가수로 전락했다. ‘녹수청산’의 대복이는 도둑질과 감방생활을 하다가 전쟁터로 끌려갔고 ‘공산토월'의 부지런하고 인정 많은 석공은 이른 나이에 죽음에 이른다. ’ 관산추정‘의 복산이는 마을의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하는 관촌마을의 농부로 ’여요주서‘의 신용모는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써 재판을 받고 ’월곡후야‘의 김희찬은 제 분수를 파악하고 귀농해 농부가 된다.
이렇듯 각각의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들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인데 이야기를 읽는 독자는 그 주인공들을 만나 함께 웃고 함께 눈물을 흘리게 된다. 하나같이 사연을 가지고 있는 그들은 인정이 살아있고 마음씨 고운 과거의 우리들 모습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제 <관촌수필> 책을 덮는다. 두 달여 동안 옆에 끼고 산 책을 이제 손에서 놓으려 하니 시원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다. 지금 읽은 게 처음이 아니듯이 지금 보내는 책이 마지막이 아닐 거라는 생각도 든다. 언제든 다시 꺼내 여덟 편 중 어느 것을 읽어도 <관촌수필>은 여전히 그리울 거고 때론 슬플 거고 때론 안타까울 거고 가끔은 해학으로 읽히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