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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살 친구에게

<2>

by book within

군대를 전역하고 나서 곧바로 돈을 모을 수 있는 일을 찾았고, 2주 만에 어느 정도 가격 대가 있는 일식당에서 주 5일을 일하며 일하며 3년 이상을 보냈다. 일을 시작한 지 1년이 되었을 무렵, 버는 돈만큼의 여유는 존재하지 않았고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에 지쳐가기 시작했었다. 식당 특성상, 어린 나이의 친구들을 상대하는 건 주말이 유일했다. 그런데 수요일 저녁, 책가방을 멘 친구가 브레이크 타임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누구 기다려?

- 네


말을 걸어 줄 누군가를 기다렸던 것처럼 눈에 생기가 돌았고, 대화를 하고 싶다는 듯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약간의 호기심이 생겼지만, 몇 마디 더 나눴다가는 골치 아픈 시간이 될 것 같았다.


- 저기 앉아서 기다릴 수 있어? 여기 문 앞이라 조금 불편할 거야

- 형은 몇 살이에요?

- 스물여덟


아, 저런 눈을 하고서 얌전히 앉아있을 거라고 기대해 버렸다. 내가 관심을 보였는데 이대로 돌아서는 건 너무 무책임한 행동인가 싶었다. 이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해내야 했다.


- 대학교 갔어요?

- 나 졸업도 했어. 2~3년 지났나?

- 군대는요?

- 갔다 왔지

- 저는요. 대학교는 못 갈 것 같아요. 돈이 많이 들잖아요.


대답을 듣고, 몇 초 동안 갈림길에서 헤매기 시작했다. 대학교? 사회성 짙은 딱딱한 대답을 해줘야 되나? 아니면, 그런 거 다 필요 없다고 얘기해 줄까? 그건 너무 무책임한데. 결국, 애매한 말로 대답을 피했다. 어린아이 앞에서조차 솔직하지 못한, 겁쟁이 같은 행동이었다.


- 어… 괜찮아. 안 가도

- 가야 된다고 그러던데…


여기서 더 이어졌던 무책임한 대화는 기억이 왜곡되어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나를 올려다보던 시선은 먼 곳을 향하기 시작했고 생기를 잃어가던 눈을 기억하고 있다. 민망함에 돌아가려는데, 눈치 빠른 친구는 대화의 흐름을 바꿨다.


- 저는요. 지금 진짜 동생을 기다려요. 오늘 할머니, 할아버지도 오신다고 하셨거든요.

-... 그래?

- 그래서 제가 마중 나와 있는 거예요.

- 동생이 몇 살이야?

- 진짜 동생은 여섯 살이고요. 다른 애는 일곱 살이에요. 근데, 말을 진짜 안 들어요.

- 뭐야, 너는 몇 살인데

- 아홉 살이요

- 이학년?


다시 빛나는 친구의 눈을 마주했다. 이렇게 열심히 얘기를 나눠주는 사람이 너무나 고마운 듯, 그 눈에서 안쓰러움과 반가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래서, 그랬구나. 한창 도움받아야 할 나이에 이해하기 힘든 가정을 받아들였고, 보다 힘들어하는 부모님을 보며 하고 싶은 말과 행동들을 혼자서 삭히기 시작했을 것이다. 얘기를 들어주고, 생각과 감정을 나눠 줄 사람을 기다렸을 것이다. 그렇게 혼자 있던 순간, 내가 나타났고 엄청난 용기를 냈다는 걸 알아차렸다.


너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래? 가족과 함께 식당으로 들어오는 그 친구를 보며 9살의 내가 떠올랐다.


우리 부모님은 지금까지도 싸움 대신 침묵과 회피를 선택하고 있다. 다행인지 서로 갈라지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대화 없는 집이었지만 하루에 두 끼 정도는 먹을 수 있었고, 작지만 방 세 개와 화장실이 하나 있는 괜찮은 집이었다. 물론 그때는 굉장히 불행하다고 생각했지만. 일을 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와 두 살 어린 남동생이 함께 살았다.


장손으로 태어난 나는 이유 없이 뛰어나고 대단한 아이가 되어있었다. 분명히 그러지 않았을 텐데. 그랬다고 한다. 온 세상의 기대를 받아 지구를 구원할 것처럼.


왜? 도대체 왜. 동생이 하나를 할 때 나는 두 개 이상을 해내야 했고, 한 개를 틀리면 혼이 났다. 이유를 듣지 못했고, 질문은 묵살되거나 손찌검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책을 읽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서 혼자 찾기 시작했다.


초등학교를 지나 중, 고등학교를 지나며 평범한 집은 조금 어려운 집이 되어갔다. 부모님의 불평들이 귓가에 스쳤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당연히 이유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특별한 일을 하고 싶었다. 부모님과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만의 세상이 점점 커져갔다. 그 세상조차 누가 뭐라 할까 무서웠다. 들키지 않기 위해서 주변과 최대한 멀어지기 시작했다.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그때, 친구들이 그랬다. 넌 좀 이상하다고, 같이 있으면 어색하다고. 당연히 이유를 묻지 못했다. 나쁜 말과 행동으로 돌아올까 봐. 더 멀어질까 봐.


9살 친구의 식사는 8명이 들어갈 수 있는 방에서 이루어졌고, 두 시간이 지나자 자리가 끝이 났다. 잘 가라고 인사했다.


-형 고마워요

-그래, 그래. 잘 가


미안해. 도와주지 못해서. 너도 꽤나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겠구나.


근데, 나도 이겨내고 용서하려고 애를 썼는데 똑같이 고생하라는 거야 뭐야.


나이 지긋한 할머니 할아버지보다, 동생들을 챙기느라 바쁜 어머니보다, 계산을 마치고 한숨을 쉬는 아버지보다 어둡던 그 친구의 뒷모습이 아직도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몇 해를 지나 지금 고등학생이 되었을 친구에게. 아직도 그 눈이 빛을 잃지 않았기를, 나보다 일찍 자신을 돌보고 이해하며 살아가고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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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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