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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버스에서(3)

<5>

by book within

몇 년 전의 일입니다.

코로나가 잠잠해지며 늦은 시간에도 버스를 타는 사람들이 많아졌을 때, 스무 살 초반쯤으로 보였던 한 사람을 기억합니다. 저와 같은 정류장에서 버스를 탔고, 맨 뒷자리의 양 끝을 차지했습니다. 노란색 가디건과 청바지, 안경과 마스크를 쓴 그 사람은 어쩐지 무거워 보였습니다.


‘쿵‘


몇 정거장을 지났을 때, 큰 기척이 느껴졌습니다. 기사님의 과격한 운전 때문인가 싶었습니다. 눈을 뜨니 그 사람이 복도 쪽으로 머리가 향한 채 쓰러져 있었습니다.


빠르게 이어폰을 주머니에 넣었지만 몸이 얼어붙었습니다. 어디서 본 것처럼, 용기 있는 누군가가 사람을 돕는 일들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나타나길 바랐을지도 모릅니다. 무서움을 느꼈고, 뭘 해야 할지 감이 서지 않았습니다. 정말 짧은 시간이었지만 먼저 나서지 못했음에 지금에서야 용서를 빕니다.


잠시 굳은 사이, 바로 옆자리에서 사건을 마주한 아주머니가 119에 전화를 걸고, 버스를 세우기 위해 앞으로 뛰쳐나갔습니다. 그제야 굳어있던 발이 풀렸습니다. 엎어져있는 몸을 뒤집어서 코에 손을 대보았습니다. 다행히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앞자리에 있던 남자분과 함께 그 사람을 일으켜 앉혔습니다. 눈을 뜨지 못했고, 대답 대신 쌕쌕거리는 소리가 이어졌습니다.


버스를 세우고 돌아온 아주머니는 딸을 대하듯이 팔과 다리를 주물러 주었고, 저는 떨어진 안경과 핸드폰을 주워 가방 앞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그때 보았습니다. 벗겨진 안경과 한쪽 귀에 걸쳐진 채 흘러내린 마스크 사이로 드러난 얼굴. 부어있는 눈과 상처, 양쪽 볼을 덮은 푸른색과 노란색의 멍을 보았습니다.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켰습니다. 깨진 안경을 다시 씌울 수는 없었기에 마스크만 제대로 고쳐 씌워드렸습니다.


10분쯤 지났을 때, 구급차가 도착했습니다. 구급대원의 등에 업혀 버스 뒷 문을 내려가는 모습을 보며, 핸드폰이 가방 앞주머니에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버스가 먼저 떠났고,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조용히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날 이후 되물었습니다.

뭐가 그렇게 어려워서 말 조차 하지 못했을까.

왜 도와달라고 말하지 못하고, 얼굴만 한 마스크를 쓰고 숨겼을까.

뭘 그렇게 잘못해서, 아니. 누가 그렇게 화가 나서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무슨 일인지, 어떤 사이였길래 꾹꾹 참고 집으로 가야 했을까. 왜 안경을 써서라도 참은 눈물을 가려야 했을까요.


제 눈에는 잘못한 게 없어 보였습니다. 남색의 책가방은 그 사람만큼 무거웠고, 깨진 핸드폰의 바탕화면에는 강의 시간표가 떠 있었습니다.


그대로 아무도 모르게,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집에 갔으면 괜찮았을까요. 내일도, 모레도 똑같은 날이 이어질 수 있었을 텐데.


어쩌면, 저의 과한 생각으로 부풀려진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그게 났겠죠.


그 사람은 이제 대학교 졸업을 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 훨씬 나은 삶을 만나고 있기를.


안경을 벗고, 마스크를 벗고 누군가와 눈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와 쓰러지지 않을 힘을 갖게 되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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