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한 보람

엑셀에 정리한 시험관 치료 기록

by 카후나

오랜만에 설국님과 희망님을 만났다. 두 분은 제일 친한 난임 동료로 오픈채팅방에서 알게 되었다. (이름은 모두 닉네임) 최근 시험관 차수 일정도 묻고, 이번에 난포는 몇 개나 보이는지, 난소에 물혹은 없는지, 이런 안부를 나눴다. (시험관러에게는 이것들이 가장 중요한 안부랍니다.)


치료 기록은 어떻게 하세요? 과거 차수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물었다. 설국님은 엑셀에, 희망님은 휴대폰 메모장에 간단하게 하신다고 했다. 나도 엑셀파. 시험관 1차부터 치료 내용을 정리했다.


그간 정리한 기록을 요약하면:

1. 난자 채취: 총 10번 (+ 채취 당일 조기 배란 1번)

2. 채취한 난자: 총 68개 (3개 ~ 13개)

3. 평균 수정률: 47%

4. 총 이식한 횟수: 5회

5. 총 나온 5일 배양 배아: 7개


어차피 원무과에서 의무기록 떼면 다 나와 있는 걸 뭐 하러 기록하나,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다 뭐든 적으면 불안감이 낮아지지 않을까 싶어 엑셀에 '새로 만들기' 탭을 눌렀다.


정리한 것들은 이런 것이었다.

- 날짜, 병원 진료 유무

- 주사 종류 및 용량

- (혹시 있다면) 증상(두통, 복통, 매쓰꺼움 등)

- 초음파 결과: 난포 개수, 내막 두께

- 이벤트: 난자 채취 날짜, 채취한 난자 개수, 수정란 개수, 이식 유무, 난소 물혹 유무

오픈채팅방에서 들으니 어떤 분들은 호르몬 수치(E2, 프로게스테론 등)까지 더 꼼꼼하게 기록하신다고 했다.

시험관 3차까지 정리를 하면서 느꼈다. 기록을 하고 확실히 불안감이 줄었다. 내 치료에 대해 주치의처럼 전문적으로 아는 것은 아니라도, 내 몸에 투약하는 약 이름, 용량을 정확하게 알고 있고, 내 치료에 대해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다는 안심을 주었다.


시험관까지 하는데 곧 임신이 되겠지, 임신하면 뭐가 먹고 싶으려나. 이렇게 쳐든 교만의 머리에 알밤을 꽉 맞은 것처럼 1, 2차를 연달아 실패했다. 시작하고 반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분명 전력으로 뛰었는데, 제자리였다.


3차를 준비하면서 오랜만에 치료 기록 엑셀파일을 열었다. 별생각 없이 보다가, 내 반년을 돌려받았다. 총 79행에 나의 노력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 반년이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그 시간이 엑셀 안에서 살아있었다. 숨 가쁘게 뛰었는데 그게 제자리 뛰기였다는 것 같은 황당한 기분이 들었는데 내 기록이 그런 패배감을 조금은 위로해 주었다.


한 행 한 행 기록을 보며 지난 반년의 기억이 실감 나게 떠올랐다. 1차에 어설프게 주사를 놓다가 피가 나서 당황했던 날부터, 2차에 배아를 이식하고 임신할 것 같다고 호들갑을 떤 것까지. 역시 <기록하기로 했습니다>에서 김신지 작가님이 했던 그 말이 맞았다.

지금까지 내게 지나버린 1년이란, 그저 '작년'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한 덩어리의 시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기록해 둔 1년 속에서는 하루하루의 날들이 낱알처럼 살아 있었다.

기록이 좀 더 쌓이니, 모르던 패턴도 보였다.

1) 채취 날짜: 생리 시작일로부터 D+13일로 일정했다. 물론 주사 반응에 따라 다음 차수 언제라도 변화할 수 있는 것이지만, 참고할 수 있는 나만의 패턴이 보여 불안감을 낮추어 주었다.

2) 잘 맞는 주사: 특히 메노푸어라는 약을 주사했을 때 난포가 고르게 잘 자랐다. 이 점을 주치의 선생님께 말씀드려 치료에 반영했다.

3) 수액 추가: 생리 시작 2-3일 차에 그 달에 시험관 치료에 도전할 수 있는지 상담을 하게 되는데, 그날 항산화수액을 맞은 달은 난자 채취 개수가 좋았다. 매번 차수 첫 방문 때 수액을 처방해 달라고 졸랐다.

4) 난소 물혹: 밤잠 설친 걱정이 무안하게 며칠 사이로 없어졌다.(난소를 자극하는 시험관 시술을 자주 하면 난소에 물혹이 자주 생길 수 있다고 해요. 하지만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고 걱정할 필요가 없대요.)


이런 것들은 누가 따로 챙겨 주지 않는다. 주치의도 세세한 기록을 다 리뷰할 수는 없다. 역시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아야 하는데 치료기록을 스스로 하니 내 몸과 내 치료에 대한 숙지가 되었다. 전문가인 주치의를 믿고 처방을 무조건 따라가야 하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질문도 더 자세하게 할 수 있었고, 내가 내 치료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알수록 안정감이 들었다. 지난 차수, 이 시기에 난포 크기가 어땠지? 이런 질문이 생기면 내 기록을 찾아보며 궁금증을 해결했다. 기억은 왜곡이 심해서 믿을 수가 없는 법. 기록을 찾아보고 정확한 수치를 확인하며 나를 달랬다.


치료기록과 함께 감정도 기록했다. 매일은 아니지만 난임일기를 썼고, 감정을 정량화해서 기록했다.


난임일기는 난임과 관련한 내 마음을 두서없이, 남김없이 적는 말하자면 하소연/살풀이 같은 것이었다. 난자 채취하기 전 날 떨리는 마음을 정리하기도 했고, 남편과 난임 문제로 싸웠을 때도 무작정 백지에 내 마음을 쏟아냈다. 무엇보다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뒤틀린 마음에 이성적엔 사고를 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일기를 쓰자마자 스스로 읽으면서, 와 이건 정말 비이성적이다,라고 생각한 적이 참 많았다.


-2, -1, 0, 1, 2 이렇게 5 단계로 감정 기록을 했다. 내 기분조차 알 수 없는 날들이 계속되어 나를 제대로 보자는 동기에서 시작했다. 이렇게 기록하면서 알게 된 것은:

1) 평균이 0.9 정도: 사실 더 뭘 바라나 싶은 점수다. 이만하면 괜찮게 지내고 있는데 스스로 느끼는 것은 훨씬 낮았다. 어쩌면 나는 나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쁜 것만 확대해서 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2) -2가 많을 줄 알았는데 1년에 2번 정도였다. 그 마저 곧 즐거운 일이 생겨 평균을 낮게 하지는 못했다.


난임 일기를 쓰는 것과 감정 점수를 기록하는 것이 나름대로 나를 객관적으로 보는 것에 도움이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를 지킬 수 있는 힘이 되었다.

그는 늘 자기를 객관화할 줄 안다. 그래서 늘 자기에서 머물고 자기를 지킨다. 나는 늘 나를 주관화한다. 그래서 늘 내게 머물지 못하고 나를 지키지 못한다.

_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215쪽


하지만 그 위로 시간이 쌓인 겁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며, 누군가는 적어서 남겨두고 누군가는 흘려보내는 바로 그 시간요. 시간이 쌓인 기록은 사실 그게 무엇이든 귀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매일이 나의 역사입니다. 어쩌면 일기야말로 오늘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부치는 엽서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이라는 건 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이야기니까.

김신지,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4년간의 치료 기록이 엑셀 파일 814번째 행에서 마침표를 찍었다. 마지막 기록은 출산이었다. 흘려보내지 않고 기록을 남겨서 다행이다. 1번째 행부터 마지막 행까지, 첫 과배란 주사 멍 자국부터 분만장의 아기 울음소리까지 아기를 만나기까지의 역사를 기록할 수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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