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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후나 Jun 13. 2024

보내진 않겠지만

밑줄 친 문장에서 시작하는 에세이


보내진 않겠지만 by 은곰


아빠에게,


며칠 전 나에게 전화해서 소리를 지르고 끊었지. 그때 나는 9개월 된 딸에게 이유식을 먹이고 있었는데 아기가 내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더니 울기 시작했어. 수화기 너머로 분명 빽빽 아기 우는 소리가 들리는데도 아빠는 계속 화를 냈어. 그리고 내가 말하는 도중에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어.  


아빠가 한 말은 부당했어. 억울해서 바로 오해를 풀려고 전화했는데 받지 않았지. 몸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말이 있는데 할 수 없다는 게 그렇게 큰 고통인지 몰랐어. 발신하고 싶은 말이나 이미지까지 인스타 스토리로 공유하는 행동을 자주 했기 때문일까? 예전에 비슷한 상황에서보다 미치고 팔짝 뛰겠다는 감정이 과하게 세고 악해서 손이 다 떨리더라.


그날 밤 겨우 잠들 수 있었던 건 이 문장 덕분이었어.
“오해는 필연이야. 괜찮아.“
이 말을 손에 쥐고 체념을 하니 잘 수 있더라.


아무리 해명을 해도 아빠는 나를, 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할 걸 알아. 해명하면 거기에 또 다른 오해나 붙겠지. 맞아, 내가 아빠를 오해하고 있는 것도 많겠지. 아빠도 억울한 점이 있을 거야.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만큼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거야.
그런데 어쩔 거야? 평생 이렇게 말하지 않고 살 수는 없는 일이잖아. 그래서 내가 밥 먹자고 전화한 거야. 내가 아빠를 안아줘야지 어쩌겠어?
만나서 나는 단 한마디도 해명하지 않았어. 오해는 필연이니까. 이해받고자 함을 포기했어. 아무리 오랫동안 정확한 단어로 공들여 말해도 전달될 수 없다고 생각했어.


우리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웃으며 헤어졌는데, 나는 그 이후로 웃지 못해.


예전에 갈등이 생기면 나는 아빠가 왜 화가 났는지 표면적인 이유 말고 근원적 이유를 알고 싶어서 이 악물고 이해가 될 때까지 질문했어. 내 입장도 끝까지 이해받으려고 집까지 따라가서 밤을 새우며 이야기했잖아. 그러고 나면 감정의 과잉으로 그날은 울면서 자도 다음 날은 웃을 수 있었어. 그제야 아주 아주 조금은 서로를 이해했다는 마음이었으니까, 아빠 앞에서 나는 편집되지 않은 나였으니까, 본래의 나와 불일치함이 없었으니까.


이번에는 그렇지 않네. 아빠 앞에서 하고 싶은 말을 편집했어. 삭제하고 또 삭제했어.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지만, 한다고 현실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니까. 오해는 필연이니 말하지 않고 그냥 덮어 놨는데, 그 아래서 부패하고 있는 것 같아. 시간이 지나면 썩어 없어져서 괜찮아지려나?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원래 내 방식대로 아득바득 대화를 이어갈지, 아니면 오해는 필연이고,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니, 일부는 포기하고 겉으로의 평화를 유지할지. 아빠, 이런 평화도 가치가 있는 것일까? 아빠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이해하고 이해받기 위해서 더 노력할 걸 그랬다고 나중에 후회하진 않을까?


이 짧은 에세이를 뉴스레터 <오곰장 편지>에 실었습니다.

    - 29호 : 이해와 공감, 소통의 문장들

    - 오곰에세이(밑줄 친 문장에서 시작하는 에세이)꼭지


오곰장 편지

오곰장오늘의 문장을 줄인 말입니다. 문장은 읽는 이의 시선에 따라 같은 문장도 각기 다른 의미로 읽히잖아요. '문장'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걸 표현하고 싶어 자를 뒤집어 이라고 썼어요. 그래서 오곰장입니다. 편지에 담긴 문장메모와 에세이는 '자아성장 큐레이션 플랫폼' 밑미에서 진행하는 하루한줄 문장메모 리추얼 메이트들의 것입니다.(https://www.nicetomeetme.kr/rituals/01gf985h81pt6dav4eqtt75mch) 매일 책을 읽고 손글씨로 오늘의 문장을 함께 쌓아가고 있어요.



(왼쪽부터) 희곰, 은곰, 하곰 - 저는 이 중 가운데 은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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