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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금 Mar 18. 2024

태교 여행이란 것을 가서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것을 배웠다

양수검사 결과가 정상으로 나왔다. 비정상이 나올 거라고 예상했던 사람처럼 좋은 결과였는데도 받아내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사실에 집중해야지 하며 문자로 받은 검사 결과를 계속 열어 보았다. 임신했구나. 세상에.


그제야 정신이 들고 날짜를 헤아렸다. 벌써 임신 기간이 반이 지났다. 임신 20주가 되어서야, 비로소 스스로를 임신부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마음 깊은 곳까지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3년 넘게 임신에 관해서는 좋은 소식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아직도 자동으로 조심하고 있다. 그동안 안심하는 마음이 들면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험한 소식이 귀신같이 나를 덮쳤으니까.


양수검사를 통과하고도 낭떠러지 위 출렁다리를 건너는 사람처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넘기고 있었다. 남편이 여행을 가자고 했다. 만약 아기가 무사하게 태어난다면, 우리가 그렇게 좋아하는 하와이에 당분간 못 가는 게 아니냐고, 그전에 꼭 가고 싶다고, 소원이라고 했다. 1년 전 여름 그야말로 칙칙한 영혼이었던 나에게 삶의 입맛을 찾아준 그곳이었다.


2023년 4월 18일 여행 일기

@호놀룰루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고 랜딩 준비 중이다. 24분 남았다. 거의 다 도착했는데도 지금 어디를 가는 중인지 실감이 안 난다. 4년을 기다려 어렵게 한 임신인데 하와이까지 태교여행을 갈 일인가, 이 생각을 하와이에 다 도착해서도 하고 있다. 하지만, 김민철 작가님이 그랬지.

"지금을 남김없이 살아버리는 것. 다시없을 지금. 여기. 다시없을 내가 있다. “

_ 김민철, <모든 요일의 여행>


지금이니까 할 수 있는 이 여행을 집중해서 즐겨 보자. 다시없을 지금 여기에 집중하자! 하지만 자신이 없다. 걱정하는 건 많이 해봐서 잘하는데 즐기는 건 많이 안 해봤다. 내가 할 수 있을까? 걱정만 하다가 여행이 끝날 것 같다. 그래도 아기를 위해서 해보자. 이완하고 즐기는 것이 이번 여행의 챌린지다. 과연…


2023년 4월 27일 여행 일기

@서울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 지금 여기‘에 집중하자 라는 모토를 가지고 9일을 지냈다. 호놀룰루가 서울인 것처럼 여행의 처음 3, 4일은 ’ 지금 여기‘에 있질 못했다. 그러다 아기를 위해서라도 걱정 말고 이완을 해보자, 태교라고 생각하고 즐겨보자고 결연히 다짐하고 조금 달라졌다.


뱃속의 아기를 꼬셔보기로 했다. 아기에게 세상이 이렇게 멋진 곳이니 무럭무럭 자라서 건강하게 세상에 나오는 게 어떠냐고 계속 말을 걸었다. 이런 마음으로 태평양의 햇빛을, 파도를, 아자수를, 선인장을, 거북이를 봤다(보여주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열심히 반짝이는 세상을 보는 것(혹은 보여주는 것)에 집중했다.


그렇게 지내고 나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가 나에게 사는 법을 알려준 것 같다. 나를 위해 즐기는 것은 성공한 적이 없는데, 아기를 위해 걱정 말고 이완하자고 생각하니 마음껏 즐기는 게 가능했다. 드디어 임신한 것도 실감하게 되었다.


얼마 동안인지 생각도 안 나게 오랫동안 빈곤, 악운, 질병 등 인간의 그늘만 독차지하다 보니 드디어 표정을 포기한 그림자가 돼 버린 것이다.

_ 박완서,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536쪽


문학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실제로도 이럴 수 있다. 사람이 그늘에만 있으면 그림자가 될 수 있다. 내가 난임기간 동안 그랬다. 태교여행에 가서 ‘지금 여기’에 집중하고 ‘표정을 포기한 그림자’가 비로소 표정을 찾는 느낌이었다.


여행의 힘을 다시 느꼈다. 서울에서라면 이런 태도의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무리해서라도 여행을 다녀오길 잘했다. 아기에게, 나에게 세상이 이렇게 멋진 곳이라는 것을 열심히 보여주자고 아침마다 다짐하면서 임신 중기를 지나 후기에 진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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