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익숙해 지지 않은 이 삶의 실험을 계속한다
작년 연말 난생 처음 공연을 했다. 비정규노동자의집 꿀잠에서 한 이 공연은 공연장소의 이름처럼 비정규노동자인 예술가와 기획자, 그리고 무려 40년 경력의 봉제 노동자가 주인공이었다. '(별점 없음) 아마추어의 아마추어에 아마추어를 위한 실험'이라는 다소 긴 제목의 공연에 참여하게 된 것은 순전히 신소우주, 다들 소우라고 부르는 작고 단단한 마흔 초입의 여성 작가 때문이었다. 소우는 봉제 노동자 강명자, 권영자 언니와 함께 펭귄 어패럴이란 이름으로 오년 째 작업을 이어오고 있는데 2021년엔 이 업계에선 꽤 유명한 두산 아트센터에 공연을 올렸다. 그때 관람객 리뷰 중 하나가 바로 ‘별점 없음, 아마추어의 아마추어에 아마추어를 위한 실험’이었다. 야박한 리뷰의 관객은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공연을 보며 기성 공연과 전혀 다른 세련되지 못한 무대에 별점을 줄 수 없다고 판단했고 아마추어들의 실험이라고 단언했다.
이번 공연엔 신소우주, 강명자, 권영자 말고도 관객 1, 2, 3의 제소라, 고주영, 쟤, 무대공연을 이끄는 드라마 터그에 펭귄 어패럴의 공연에 늘 음악을 담당하는 가수 복태가 함께 했다. 관객 1로 참여한 나는 드라마 터그 라는 단어조차 생소한 그야말로 공연에 무지한 아마추어 참여자였다. 공연을 준비하며 함께할 이들을 만났는데 관객 3으로 참여하는 쟤, 혹은 제제라고 부르는 정지혜는 줌 화면으로 만났다. 젊은 문화 기획자이자 예술인이며 문화 활동가인 쟤는 급성 폐렴으로 입원 중이었다. 쟤는 암 환자였는데 암 환자의 폐렴은 위험할 수 있다고 했다. 무대에 서기 위해 공업용 미싱도 배웠다. 무대에 서는 것도 처음, 미싱질도 처음이었지만 두 명의 유쾌한 언니와 다정한 동료들 덕분에 내내 즐거웠다. 미끈하게 다듬고 그럴듯하게 각색된 이야기가 아닌 그저 현재의 나, 제소라 로 참여한 이 공연은 세상 어딘가에서 애쓰며 결국은 살아내는 이들의 이야기였다.
공연무대는 초록색 갓을 씌운 무대 조명 아래 역시 초록색의 작고 둥근 무대가 전부였다. 그리고 펭귄어패럴의 초보 미싱사 소우가 몇 년에 걸쳐 일자박기로 미싱질 한 흰 우라 천이 무대의 커튼이 되었다. 무대의 조명 갓에는 ‘누군가를 위한 한 줄기 빛’, 작고 둥근 무대에는 ‘아마추어를 위한 무대’ 라고 쓰여 있었다. 이 초록 무대에서 명자언니는 딸의 결혼식에서 한 멋진 축사를 재현했는데 노모를 즐거운 자리로 불러내지 못해 마음 아팠던 순간을 나누며 자신의 삶과 우리의 삶을 함께 축복했다. 영자 언니는 배우인 딸의 대본을 여러 번 읽으며 자신을 새로 발견했고 예술가인지 기획자인지 혹은 활동가인지 아니면 그 무엇도 아닌 건지 고민하는 예술 하는 여자들인 소우와 관객 1,2,3은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 줬다. 그리고 서로에게 화답하듯 미싱을 밟았다. 병실의 쟤, 정지혜는 랜선을 타고 노트북 화면으로 공연 내내 함께 했다. 각자 삶의 속도도 다르고 미싱 소리도 제각각이었지만 함께 미싱을 밟으며 그날 그 자리 서로의 삶의 한 순간에 함께 있었다. 그리고 공연 막바지, 배우들은 그 자리의 관객을 위해 미싱을 밟았다. 해마다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새해를 맞이하고 예측 불가능한 삶을 용기 내어 살아내는 배우와 관객 모두 아마추어들이니 말이다. 그러니 공연도 삶도 아마추어를 위한 실험이 맞다. 세상의 아마추어들을 위해 그들의 삶을 응원하며 배우들은 마음을 다해 미싱을 밟았다.
공연을 마치고 잠시 어설픈 배우였던 우리들은 무대에 모여 대본 집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노트북 화면의 쟤는 그림 속에서 가장 작게 그려졌다. 아픈 몸으로 살면서도 자기정체성에 대한 질문과 활동의 끈을 놓지 않던 뜨거운 열정가, 아마추어 쟤, 정지혜는 2023년 12월 9일 이번 생의 실험을 이르게 마쳤다. 남은 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끝내 익숙해 지지 않은 이 삶의 실험을 계속한다. 문득 쟤를 기억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