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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도 괜찮아, 까칠해도 상관없어

늙은 여자가 너그럽다는 건 가부장 사회의 환상이니

by 조용한 언니

요즘은 어딜 가나 가장 나이가 많다. 수요일마다 하는 여성 노인을 위한 드로잉 수업 제외하면 늘 왕언니가 된다. 꽉 찬 왕언니의 나이가 되었지만 예전의 언니들처럼, 혹은 수요일 만나는 넉넉한 노년의 여성들처럼 온화한 인품이 내게 없다. 그렇다고 앙상한 성정을 가릴만한 지위와 명예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당연하게 경제적 여유도 없다. 대신 까탈 맞고 삐딱한 늙은 여자가 있다. 이 연배쯤 되면 다들 어울렁더울렁 무난해지던데 그게 좀처럼 되질 않는다. 나이가 들면 학력의 차이도, 성별의 경계도 무심해지고 돈의 많고 적음도 무색하다는데 현실이 정말 그런가. 학력의 차이는 사회적 인적 자원의 차이가 되고 이 차이는 나이 들수록 경제적 격차를 불러온다.

나이 든 여자, 특히 지위 없고 가난한 늙은 여자는 어디서나 쉽게 노인 혐오와 여성 혐오 이중의 대상이 된다. 나처럼 말 많고 가난한 늙은 여자에게 잔인한 말은 나이 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는 말이다. 두둑한 지갑이 없는 중년과 늙은이는 하고 싶은 말도 하지 말라는 건가.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를 사전에 막아버리는 이 말은 돈보다 나이가 권력이던 시절엔 유효했을지 모르나 돈을 섬기는 물신주의 사회에선 폭력적이다. 하여 이런저런 사정으로 나는 심술궂고 심통 맞은 늙은 여자가 되어가는 중이다.

마흔이 넘은 얼굴은 스스로 책임지라는 말도 가장 듣기 싫은 말 중 하나다. 마흔 전 얼굴은 유전자 탓이지만 마흔 뒤 얼굴은 자신의 책임이라는 건 절반만 맞는 말이다. 내 얼굴이야 내가 책임진다지만 인생의 마른자리, 양지를 디디고 온 이와 삶의 진자리를 지나거나 여전히 진창 속에 있는 이의 얼굴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나. 중년을 넘겼음에도 그늘 없이 팽팽한 얼굴, 잡티 없이 해사한 얼굴은 적어도 내게는 매력 없는 얼굴이다. 마흔을 오래전 넘은 내 얼굴은 사사건건 민감하게 세상의 괄시와 무시에 인상 쓰느라 양미간엔 굵은 주름이 잡히고 양 볼엔 심술주머니가 생겼다.

종종 나를 보며 미대 나온 여자, 부잣집 여식이라고 칭하는 이들이 있다. 예술을 하며 나이 드니 얼마나 좋냐고 되묻기도 한다. 은퇴를 앞두거나 은퇴한 그들은 각종 문화예술, 인문학 강좌의 소비자들로 어린 시절의 가난을, 그래서 그때 체험하지 못한 예체능 교육에 대해 녹차 티백 우리듯 반복해서 이야기한다. 그리고 나의 유년이 유복했을 거라 맘대로 상상한다. 이들은 비정규직이 없던 시절, 대학을 졸업한 뒤 안정된 직장에 취업하고 정년을 바라보거나 정년을 한 나이로 은퇴 후 연금이 보장되는 삶이 당연하고 익숙하다. 그들의 여유로운 삶은 그들의 노력과 함께 주류의 질서를 한 번도 벗어나지 않는 덕도 있다. 경계 밖의 삶은 상상하기 힘든 그들에게 늙음은 나와는 다른 온도와 질감을 가진다. 여유 있는 마음, 사소한 차이에 연연하지 않는 넉넉한 태도는 그들의 부동산과 연금에서 나온다고 여기는 나는 야박하고 삐딱한 걸까.

얼마 전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나이 든 여자로 사는 것에 대해 말했다. 쉰 초반을 막 넘어서는 친구는 어정쩡한 경력의 자신보다 일터에서 자리 잡은 삼십 대들의 빠른 속도와 업무 능력 앞에 자주 초라하다고 했다. 오랫동안 여성단체에서 일하고 지역 공동체에서 활동한 친구는 규모 있는 공적인 조직에서 일하면서 부쩍 늙은 여자임을 실감한다고 했다. 시스템 밖에서 오랫동안 활동하거나 정규직이 아닌 삶을 살아온 많은 사람, 특히 중장년 여성들은 자신의 이력과 목소리에 주목하지 않는 사회에 익숙하지만 익숙하다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집도 절도 없고, 서방도 새끼도 없는 가진 건 쥐뿔도 없는 나는 날이 갈수록 점점 까칠한 늙은 여자가 되어간다. 그런데 까칠한 늙은 여자가 뭐 어때서. 늙은 여자가 너그럽다는 건 가부장 사회의 환상이니 내가 그 환상을 따를 필요는 없지. 까칠하게 늙어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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