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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을 걸어요

지긋지긋함과 다정함이 함께 하듯

by 조용한 언니

러브버그를 방충망에서 발견하면서 여름이 시작되었다. 몇 년 전부터 내가 사는 은평구에 특히 더 창궐하는 러브버그는 이르게 찾아온 더위와 함께 여기저기에서 눈에 띄었다. 숲에 있지 못하고 도시로 내려온 러브버그는 해충이 아닌 자연과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익충이지만 사람들은 호들갑을 떨며 징그러워한다. 러브버그가 산에서 내려온 것도, 때 이른 무더위도 다 호모사피엔스 인간종의 욕심과 지구에 저지른 잘못 탓이다. 아무 잘못도 없이 사랑은커녕 미움을 받는 러브버그는 며칠 윙윙거리다가 사라졌지만 끈끈하고 숨 막히는 더위는 한 참을 더 견뎌야 한다. 안녕하지 못한 지구의 여름은 해마다 점점 더 길어지고 있다.

매일 출근할 일이 없는 프리랜서이기도 하고 아침 형 인간은 못 되어서 생계와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낮 시간 외출은 되도록 하지 않고 여름을 보내는 중이다. 그러나 집 안도 밖처럼 덥기는 마찬가지여서 방 안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면 땀이 머릿속에서 이마로 뺨을 타고 목덜미로 주르륵 흐른다. 읽은 책, 읽지 않은 책들로 네 벽이 둘려 쌓인 손바닥 같은 방이 결국 내 세상의 전부처럼 느껴져 앞으로의 삶도 옹색하고 빈한하게 이어지다 끝날 것만 같다. 이런 느낌은 자주 비관적인 생각으로 이어져 더위보다 더 숨이 막힌다. 사실 한여름 더위보다 더 무서운 건 내 방구석에 처박혀 읽히지 않은 책처럼 나 역시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는 사람이 될까하는 두려움이다. 그러나 누가 나를 읽든 말든 밥은 먹어야 하고 구차한 일상이라도 꾸려야하기에 반찬거리나 생필품을 사러 해가 기우는 늦은 오후에 나가 장을 본다. 그리고 여름밤 산책을 나간다.


아직 낮의 열기를 머금은 미적지근한 바람이 부는 동네 골목길을 찬찬히 걷는다. 검푸른 초록 잎들이 어둠 속에서 그림자와 함께 담벼락에 그림을 그리고 불 켜진 창문이 다정하다. 한적한 골목길에서 이제 막 자전거를 배우는 아이와 젊은 아빠를 만날 때도 있고 늙은 개와 나온 중년 여자를 만나기도 한다. 자전거가 서툰 아이는 자꾸 아빠를 부르며 뒤돌아보고 아빠는 괜찮다고 하면서 어서 가라고 손짓을 한다. 중년 여자와 늙은 개는 느긋하다. 적당한 거리에서 보는 여름밤 풍경은 그런대로 고즈넉해서 그 풍경 속에 나도 그런대로 괜찮아 보인다. 한낮 더위와 엉킨 심란함은 어둠에 묻혀 잠시 평화롭다. 점점 낡아가는 몸은 더위에 쉽게 지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낡은 몸 덕분에 불안과 심란함을 오래 붙들고 있지 못한다. 한 여름 같은 열렬함을 잃은 대신 슴슴하게 오래가는 법을 알아가는 걸까? 물론 그렇다고 나아질리 없는 살림살이와 막막한 앞날에 대한 걱정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매일 불안하고 또 그 불안을 다독이며 하루하루 산다.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는 책 같은 사람이 될까 늙지도 않는 자의식이 문득 고개를 쳐들지만 무심하게 책장을 넘기듯 여름밤을 걷는다. 나는 내 삶이 웅장하고 드라마틱한 대 서사시가 아니라는 건 이미 오래 전 알고 있었다. 시장에서 푸성귀를 사고 매일 밤 한갓진 동네 골목길을 산책하는 사람이 어느 날 화려하고 번쩍거리는 삶을, 생활을 할 리는 만무하니 말이다.

걸었던 길을 되짚어 낡고 더운 집으로 찬찬히 되돌아온다. 누가 사는지 모르는 불 켜진 창도 다정했으니 오래 같이 산 원 가족이 있는 집 창문도 지긋지긋하고 또 다정하다. 지긋지긋함 속에 다정함이 있는 것을 아는 것처럼 불안의 속내에는 남들처럼 살지 못한다는 정상성에 사로잡힌 내가 있다는 걸 안다. 알아도 자주 불안에 무릎을 꿇지만 지긋지긋함과 다정함이 함께 하듯 불안해도 잘 살 수 있다. 낡고 늙어가지만 누가 읽든 읽지 않든지 나는 나대로 온전하다는 걸 아주 조금씩 알아간다. 그래도 너무 더워서 친구가 알려준 ‘공공재생에너지법’ 청원에 참여했다. 훗날 올해 여름이 가장 시원한 여름이 되지 않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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