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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로리나 Dec 10. 2021

너의 꽃말은 변덕이 아니라 변화

수국

  “너는 좋아하는 꽃이 뭐야?”


  나랑 그다지 친하지 않은 동료 언니가 물었다. 같은 팀 소속이었지만 우리 둘의 업무는 협업할 부분이 없었기 때문에 딱히 친해질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아예 서로에게 무관심하게 지낼 수 없는 둘만의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우리 둘은 이름이 똑같다는 점이다. 하지만 친하지 않은 사이인데 이름이 같다는 것은 꽤 어색하고 불편한 일이었다. 상대방을 부를 때마다 번번이 어색하다 못해 오글거리기까지 하는 희한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의 꽃 취향 질문으로 우리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언니, 저는 수국 좋아해요!”


  꽃에 대해 무지한 나는 뭘 알아서 수국이라고 대답한 게 아니었다. 그냥 많은 여자들이 수국을 좋아하니까, 하늘하늘 거리는 파스텔톤 작은 꽃잎들이 모여있는 모습은 여성스러움의 상징이니까, 꽃 취향이라도 여성스러워 보이고 싶어서 내뱉은 대답이었다.


  “조금 있으면 수국이 싸게 팔 시기인데, 내가 그때 수국 한 송이 사다 줄게.”


  점심시간 스쳐 가듯 나눈 이 대화를 나는 크게 마음에 두지 않았다. 시계추처럼 매일 집과 회사를 오가기에도 바쁜 워킹맘이 꽃 사러 갈 여유가 어디 있다고. 게다가 우리는 각별한 사이도 아닌데 나한테 비싼 꽃 선물을 왜 하겠나 싶어서 그냥 지나가는 말이라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출근했는데 핑크색 수국 한 송이가 내 자리에 놓여있었다. 누가 준 선물인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리에 앉아 한참을 꽃만 쳐다봤다. 갑자기 지난여름 돌아가신 우리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는 유복한 가정은 아니었지만 부족함 없이 자식을 키우고 싶은 마음에 엄마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뭐든 자식의 요청을 들어주시던 분이다. 입덧이 심해서 제대로 밥을 먹을 수 없던 어느 날, 엄마랑 통화하다가 수박을 먹고 싶다고 말했다. 꽃샘추위로 아직 겨울 패딩을 세탁소에 맡길 수 없던 초봄에 수박 타령을 했으니, 임산부의 어처구니없는 말을 곁에 있는 신랑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 후 친정에 저녁을 먹으러 갔는데 밥상 위에 수박이 올라와 있는 게 아닌가. 웬 수박이냐 물었더니 엄마는 내가 먹고 싶다고 해서 사 왔다고 하셨다.


  “지금 수박 파는 데가 있어? 이걸 어디에서 샀어?”


  “내가 이거 사느라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몰라. 백화점 식품관에 혹시 있을까 싶어서 두 군데나 가봤는데 없어서 그냥 돌아올까 하다가 도곡동 고급 주상복합에 있는 슈퍼마켓에 가봤는데, 거기 마침 수박이 있더라. 이거 먹고 남은 거는 집에 가져가서 또 먹어.”


  우리 집 형편은 백화점에 장 보러 갈 수준이 아닌 건 물론이고, 강남에 차를 끌고 가면 외제 차가 너무 많아서 부담스럽다고 늘 말씀하시던 우리 엄마였다. 그런데 임신한 딸의 수박 먹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추운 계절에 수박을 찾아 강남까지 운전해서 다녀오셨다니… 자식이 하는 말은 한마디도 그냥 흘려듣지 않으시는 우리 엄마의 에피소드는 수박 이야기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이런 엄마가 이제 내 곁에 없다는 사실에 난 아직 적응하지 못하고 매일 헛헛한 마음을 달래며 지내고 있었다. 그때 마침 핑크색 수국 한 송이와 스치듯 이야기한 내 말을 귀담아들어 주던 동료 언니의 마음이 내 가슴속에 훅 들어왔다.


  예쁜 수국 한 송이가 자리에서 날 기다리고 있으니 평소 앉아있기 싫던 사무실 책상도 썩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꽃 한 송이와 그 안에 담긴 언니의 마음이 내 마음을 얼마나 요동치게 했는지, 나는 그날 이후로 점심시간이면 수시로 사무실 근처 꽃시장에 꽃구경을 하러 갔다. 점심을 대충 때우더라도 싱그러운 꽃향기로 내 몸에 에너지를 채울 수 있는 그 시간이 너무 행복했다. 난 사실 그전까지는 이렇다 할 취미 생활 하나 없었고, 어렸을 때 연예인을 애타게 좋아해 본 기억도 없는 사람이다. 좋은 걸 봐도 좋은 줄 모르는 무미건조한 취향의 내가 갑자기 꽃 빠순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나의 인생 꽃이 되어버린 ‘수국’


  갑자기 어느 날 수국의 꽃말이 궁금해져서 인터넷 검색창에 수국을 검색해본 순간, 나는 갑자기 기분이 확 상했다. 수국의 꽃말이 변심, 변덕이라니, 달콤한 로맨스에 갑자기 재 뿌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수국의 특징을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다 보니 나는 갑자기 수국이 더 마음에 들었다. 수국은 흙의 산도에 따라 꽃잎의 색깔이 바뀐다고 한다. 산성 토양에서는 푸른색, 염기성 토양에서는 붉은색, 중성에서는 흰색이 된다고 한다. 같은 자리에 핀 꽃이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묘기 부리듯 색깔을 바꾸어버리니 제주도에서는 이 모습이 마치 도깨비의 장난 같다고 해서 도채비(도깨비의 제주도 방언) 꽃이라 부른다고 한다.


  ‘환경의 변화에 깐깐하게 굴지 않고 스스로 색을 바꾸며 자연스럽게 환경에 적응하는 꽃이라니! 너무 매력적이잖아.’


  어떻게 주변 환경 변화에 적응하는 수국의 변색 기술을 변덕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세상 무슨 이야기든 해석하기 나름이고, 관점의 차이는 태도를 결정하기 마련이다. 난 수국의 꽃말을 ‘변화’라 생각하겠다고 혼자 마음먹었다. 그러고 나니 오래전 그날 언니가 선물해준 수국 한 송이가 어떻게 내 삶을 바꿔놓을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꽃 문맹자였던 나는 꽃에서 받은 위로와 힘을 타인에게 전달해주고 싶어서 이제는 꽃 전도사가 되었다. 그렇게 수국은 내 삶에 변화를 가져왔다.


  흙의 성질이 바뀌면 몸 색깔을 바꾸며 또 다른 매력을 뽐내는 수국처럼 나 또한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흔들리거나 방황하지 않고 또 다른 내 모습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오늘도 나는 수국을 바라보며 변화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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