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비디움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오랫동안 막을 올리지 못했던 공연장이 이제 조금씩 다시 오픈한다는 소식에 나는 참 기뻤다. 그중에서도 신랑과 첫 데이트 때 함께 보았던 프렌치 오리지널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공연 소식은 더더욱 반가웠다. 하지만 나는 아이 엄마이다 보니 마음만큼 공연장을 자주 방문하기는 힘들었다. 이번 공연도 그냥 유튜브 영상으로만 즐겨야 하나보다 하고 마음을 접고 있었다. <노트르담 드 파리>의 서울 공연이 막을 내리기 직전, 마침 신랑의 재택근무 순번이 찾아왔고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공연 예매 사이트에 남은 자리가 있나 살펴봤다. 취소 표가 나온 것이었는지, 운 좋게 꽤 괜찮은 좌석의 티켓을 구매할 수 있었다. 혼자 공연을 관람하는 것이 어색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어차피 마스크 쓰고 가서 공연에만 집중하다 올 텐데 혼자면 어떠하랴 싶어 용기를 냈다.
식구들 저녁을 챙겨두고 부랴부랴 광화문으로 향하는 길, 이미 나는 지하철 안에서부터 과거로 떠나는 시간 열차를 탄 것 같았다. 지하철역 밖으로 빠져나오는 순간 얼굴에 스치는 차가운 겨울바람이 시원하다 못해 상쾌하기까지 했다. 티켓을 수령하려고 공연장 1층 티켓 부스를 보는 순간, 그 뒤편에 레드 카펫이 깔린 계단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곳은 귀빈실로 향하는 계단이다. 나는 공연을 보러 가서 귀빈실을 들어갈 만큼 유명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곳이 공연 전에 귀빈들을 대접하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빨간 계단을 보는 순간 내 머릿속은 회사에서 VIP 마케팅팀 소속으로 일하던 시절로 떠났다. 우리 팀의 역할은 회사의 우수 고객들을 케어하는 것이었다. 회사에서 정의하는 우수고객의 유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이용 금액이 많은 고객, 오랜 기간 이용한 고객, 신규 고객 등이었다. 우리 회사의 제품을 선택하고 애용해주시는 고객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영화, 뮤지컬, 인문학 강의 등 다양한 형태의 행사에 그분들을 초청했다. 우리는 모두 사무실에 앉아서 시장 조사를 하고 마케팅 기획을 하는 사람들이라 공연 현장에서 고객 응대를 하는 일에는 서툰 사람들이었다. 능숙한 의전 전문가들에게 현장 진행을 맡기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 당시 회사는 비용 절감을 위해 행사 비용을 최소화하고자 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감사한 고객님들을 모시는 자리에 직원들이 직접 나가서 맞이하는 게 도리이기도했다. 그래서 행사 당일이면 사무실에 앉아 컴퓨터 모니터만 쳐다보던 직원들이 공연장 곳곳에서 고객들께 서비스를 제공했다. 그중에서 내가 담당하게 된 역할은 귀빈실 응대였다.
귀빈실에 모시는 고객은 주로 공연 전 사장님과 인사를 나누며 비즈니스 관계를 다질 수 있는 다른 회사의 대표이거나, 대중의 시선이 부담스러울 수 있는 연예인이었다. 나는 귀빈 의전 경험이 없고, 돌발 상황에서 유연하게 대처할 만큼의 센스도 없었기에 공연을 앞두고 며칠간은 늘 악몽을 꾸곤 했다. 행사장에 고객이 한 명도 방문하지 않는 꿈을 꾸기도 하고, 오프닝 멘트를 잃어버려서 고객들 앞에서 멍하니 서 있는 꿈을 꾸기도 했다. 불안한 마음이 큰 만큼 나는 행사 준비에 늘 만전을 기했다.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초청된 귀빈들의 명단을 익히기 위해 네이버 인물검색, 뉴스 기사 검색을 통해 그분들 얼굴을 익혀두는 일이었다. 사진으로 보던 얼굴을 행사 현장에서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나는 내 안의 모든 총기를 모아 명단을 외웠다. 이렇게 사무실에 앉아서 준비할 수 있는 일을 끝내고 나면, 현장 답사를 나가 행사장 동선을 꼼꼼하게 살펴봤다. 이렇게 고객들을 맞을 준비에 최선을 다한다고 노력해도 매번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아마추어 행사 담당자는 현장에서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발생하면 당황하기 마련이다. 나 역시 그랬고 당황한 마음에 나의 행동은 성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일이 발생하고야 말았다. 남편분께서 바쁜 일정으로 못 오셔서 친구분과 함께 오셨다고 인사를 하셨던 우아하신 사모님이 내게 부탁을 청했다. 급하게 귀빈실로 들어오다 보니 좌석 위치를 미리 확인하시지 못하셨다고, 좌석 안내를 도와줄 수 있는지 물어보셨다. 주변을 돌아보니 그때 귀빈실을 지키고 있는 직원은 나 한 명 밖에 없어서 자리를 비워도 될까 고민이 됐다. 하지만 해당 공연장은 귀빈실에서 2층 객실이 바로 연결되는 곳이었다. 가까우니까 빨리 사모님께 좌석 안내를 해드리고 돌아오면 되겠다 싶어서 나는 사모님들보다 조금 더 앞서서 빠른 걸음으로 객석 계단을 내려갔다. 마음이 급한 만큼 발걸음도 급했던 탓이었을까, 갑자기 내 구두 한 짝이 벗겨지고 말았다.
‘맙소사! 어쩌지? 걸어 올라가서 얼른 신발을 신어야 하나? 일단 자리를 먼저 안내하고 이따가 신발을 신어야 하나?’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그 순간 나는 판단력을 잃고 말았다. 능숙하고 자연스럽게 상황 대처를 못 하는 나 스스로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그런데 갑자기 사모님이 허리를 숙여 내 구두를 집으시는 것이 아닌가. 온종일 서 있어야 하는 날이라서 나는 그날 내가 가진 신발 중 가장 편안한 검정 구두를 골라 신고 나왔다. 한마디로 내 발에 익숙한 만큼 오래된 신발이었다. 게다가 그날 낮부터 공연장 사전 점검을 하느라 여기저기 뛰어다닌 터라 발에 땀도 많이 났던 날이었다. 그 구두를 고객님께서 집어 주시다니 고마운 마음보다 죄송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나는 얼른 몸을 앞으로 내밀어 신발을 받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사모님이 내 앞에 구부려 앉으셨다.
“아이코, 우리 신데렐라! 열심히 일하느라고 신발이 다 벗겨졌네.”
다정하게 말씀하시며 내게 신발을 신겨주시는 사모님 모습을 보니, 짧은 순간 바짝 얼어버렸던 내 마음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만약 그분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내게 친절을 베풀어주시는 동화 속 귀부인이 아니라, 손님 앞에서 이게 무슨 태도냐며 역정 내는 막장 드라마 속 사모님이었으면 어쩔 뻔했을까 싶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공연장에서 귀빈실로 올라가는 계단을 보니 나는 그날의 해프닝과 함께 우아한 꽃 이미지가 떠올랐다. 바로 ‘귀부인’이라는 꽃말을 가진 심비디움이다. 새하얀 꽃잎에 금가루를 뿌린 듯 잔잔하게 반짝이는 심비디움의 모습이 공연장 조명 아래 온화하게 빛나던 사모님의 미소와 참 닮았다.
많은 사람이 이제 막 개업한 식당에 갔을 때 이 꽃을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호접난과 함께 심비디움은 개업, 승진 등 좋은 날을 축하할 때 많이 선물하는 서양란이다.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꽃들이 풍기는 좋은 기운은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그 주변을 방문한 사람들에게까지도 행운을 전해주는 기분이 들게 한다. 그래서 새로 개업한 가게에 또는 새로운 자리에 오른 승진자 곁에 좋은 기운이 머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사람들은 서양란을 선물한다. 하지만 우아하고 고급스럽다는 의미가 겉으로 풍기는 모습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서양란을 한 번이라도 키워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꽃은 개화 상태가 유지되는 기간이 꽤 길다. 심비디움의 경우에는 꽃이 피기 시작해서 약 2~3개월 동안 꽃을 감상할 수 있다. 비단 겉모습만 아름답고 우아하다면 이렇게 오랜 기간 고운 자태를 유지할 수 있을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인 척 연기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특히나 오랜 시간을 타인인 척한다는 건 더더욱 쉽지 않다. 갑자기 맞닥뜨린 짧은 순간에도 다른 사람인 척 자연스럽게 연기할 수 없다. 나의 내면이 아름답고 우아해야 내가 하는 말과 행동에도 항상 기품이 배어있기 마련이다. 내게 신발을 신겨주었던 우아한 여성 고객님처럼 말이다. 냄새나고 낡은 구두 한 짝을 보면서도 아름답게 반짝이는 신데렐라의 유리구두를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이 품격 있는 마음의 눈으로 내 신발을 쳐다보셨기 때문일 거다.
내 몸과 마음에도 귀부인처럼 우아한 기품이 채워지길 바라면서 나는 오늘 나에게 심비디움 한 줄기를 선물한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