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아의 인권 존중
단기 6개월로 계약한 집은 만료일이 다가왔다. 우리는 이곳에 계속 머물지, 아니면 이사를 할지를 두고 여러 가지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가장 큰 이유는 시내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출산이 임박한 시기인데 병원이 너무 멀었다.
이번에는 나도 남편을 따라 직접 집을 보러 나섰다. 땅은 넓고 집도 많지만, 막상 우리가 원하는 조건에 맞는 집은 좀처럼 없었다. 시내를 중심으로 띄엄띄엄, 볼 만한 집들을 하나씩 찾아갔다.
한 집은 거실도 넓고 이쁘고, 방도 아주 컸다. 무엇보다 시내 근처였다. 가격도 우리가 원하는 가격이라 주인과 이야기만 잘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친절하게 집을 자세히 보여주고 난 후 주인은 나의 불러 나온 배를 가리키며 곧 태어날 태아의 인권 존중으로 방 한 칸 집을 줄 수 없다고 했다. 태아도 인권이 있어서 그 아이를 위한 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주인의 주장이었다.
순간 깜짝 놀랐다. 일상에서 태아의 인권이 그렇게 구체적으로 적용될 줄은 몰랐다. 잠시 동안은 그 말이 세련되고 선진적으로 들렸다. 하지만 곧, 또다시 집을 찾아야 한다는 현실이 떠올랐다. 그리고 실망감이 더 컸다.
우리는 다시 집을 알아봐야 했다. 남편은 공부도 해야 했고, 나는 몸도 무거워서 하루에 한 군데 이상을 둘러본다는 것은 어려웠다. 지금까지 유럽 여러 곳을 옮겨 다녔지만, 집을 알아볼 때는 늘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한 번 거절당하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늘 있었다. 그래서 웬만하면 움직였을 때 그냥 계약하고 싶었다.
다음으로 본 집은 플랫하우스였다. 위치가 아주 좋았다. 영국에서도 유명하다는 Royal United Hospital이 바로 앞에 있었고, 걸어서 3분이면 닿을 거리였다. 빅토리아 공원도 가까웠다.
살고 있던 집은 플랫하우스 2층이라 정원을 만나지 못해서 아쉬웠는데 이 집은 1층이라 개인 주차장으로 연결된 넓은 공간이 있었다. 정원이라기보다 작은 마당 같은 곳이었고, 그곳에는 빨랫줄도 걸려 있었다. 아기를 낳고 아기 옷을 빨아 햇살 좋은 날에 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집을 보러 갈 때는 나는 남편과 동행하지 않았다. 이전 주인에게 거절당한 기억이 떠올라, 이번에도 또 그럴까 겁이 났기 때문이다. 나는 남편한테는 당부했다. 주인에게 딸아이 한 명이라고 이야기하고, 태아가 있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그래서 만삭의 몸으로 따라갈 수 없었다. 그 결과 우리는 그 집과 계약을 할 수 있었다.
집을 보러 직접 갈 수 없었던 나는 매일 구글 로드뷰를 보면서 이 집과 계약이 성사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는 이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