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점심식사 - 영국생활 15

고정관념을 벗자

집에서 도보로 7분 거리에는 비콘 필드(Beacon Field)라는 공원이 있었다. 푸른 잔디가 크게 깔린 공원은 축구와 농구를 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 있었고 놀이터도 있었다. 아이들이 차 걱정, 자전거 걱정 없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곳이었다.


해가 뜨는 날은 어김없이 딸아이를 데리고 비콘 필드로 나갔다. 걸어가는 동안 우리는 집집마다 붙어 있는 주소를 소리 내어 읽어보기도 하고 담벼락의 모양과 재질을 보며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이야기도 하면서 걸었다. 아이에게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나의 바람과 달리 아이에겐 너무 어릴 적 시간이라 기억이 지워졌지만......


7분이라는 거리는 짧았지만, 두 살 된 아이를 데리고 걷기엔 체감상 한 시간이었다. 그 길이 즐겁고 경쾌한 날도 있었고, 지루하고 지겨운 날도 있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걸어온 나는 공원에 도착하면 앉을 곳을 찾았지만, 딸아이는 언제 걸었냐는 듯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다행히 공원은 동네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어서, 멀리 달려가도 큰 걱정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멀어지는 아이를 눈으로 좇으며 천천히 뒤따랐다.


챌리티숍에서 거금 7유로를 들여 산 자전거를 타고 간 날은 아이의 속도가 더 빨랐다. 놀이터로 곧장 가고 싶었던 거다. 그날따라 놀이터에서 친구를 만났다. 딸아이는 더 신이 났고, 부모들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방긋 웃었다.


영국 사람들은 길에서 마주치면 늘 인사를 건넨다. 그야말로 얼굴의 근육을 있는 힘껏 올려서,

"헬로~", "굿 모닝~", "하이~" 하고 웃으며 인사한다.


하지만 인사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이 제자리로 돌아간다. 어느 날은 그 모습이 섬뜩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감정이 없이 인사를 반복하는 AI 같았달까?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을 보면 자동으로 올라가는 그 미소가 오히려 반가워졌다. 병원, 쇼핑몰에서도, 장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와도 인사를 주고받는 그들의 모습이 오히려 좋아지기 시작했다. 나도 서서히 닮아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정신없이 놀고, 부모들은 웃으며 인사했다. 집에 가고 싶은데 아이는 집에 갈 생각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해가 질 때까지 놀 수 있는 에너지였다. 그때 딸아이 친구의 엄마가 다가와서 자기 집에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아이 친구의 아빠도 함께 있었다. 주중 낮, 일하러 가지 않고 레게머리에 빈티지한 옷차림을 한 모습이 낯설었다. 나는 그들의 초대가 괜히 겁이 났다. 낯선 사람에게 받은 초대가 처음이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뭐 하는 사람들일까?'

'혹시 나에게 물건 팔려는 건 아닐까?'

'영국에 약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던데 우리에게 약을 먹이는 건 아닐까?'

거의 미저리 수준으로 겁을 먹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스칠 즈음, 그들의 친절한 눈빛이 먼저 내 눈에 띄었다. 때마침 아이들이 배고프다고 해서 우리는 함께 그 집으로 향했다. 집은 공원 바로 앞에 있었다.


그들은 도착하자 분주하게 움직이며 나를 반겼다. 앉을 수 있게 의자도 내어 주고, 이것저것 호구 조사 같은 질문도 했다. 하지만 그런 대화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먼지가 쌓인 카펫과 낡은 가구들이었다. 해리포터에 나오는 영화 세트장 같았다. 갑자기 앉고 싶지 않았고, 먹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하지만 잠시 후, 그들은 토마토 파스타를 내왔다. 미소가 가득한 얼굴로, 나를 환영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음식을 다 먹었다. 나의 장점은 식성이 꽤 좋은 편이라는 것이다. 나는 낯선 영국인들의 삶을 보면서 또 한 번 깨달았다.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내 눈에는 어지럽고 지저분해 보였지만, 그들은 누구보다 건강했고,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다. 그 공간은 그들만의 규칙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낯선 동양인 아줌마에게 손을 내밀 만큼, 마음의 여유도 있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앞으로도 이들과 친구로 지내면 좋겠다고. 많은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빛나고 있었다. 낯선 땅의 햇살 아래, 나도 그들처럼 누군가에게 먼저 미소를 건넬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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