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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효 작가 Oct 28. 2023

‘오매, 단풍 들었네’
장성 백양사

11월 첫째 주 남도여행 

장광에 골 붉은 감닙 날러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자지어서 걱졍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바야흐로 단풍의 계절이 시작됐다. 설악산에서 내려오던 단풍이 내장산을 물들이는 때, 백양사 단풍 구경을 놓칠 수가 없다.  내장산은 설악산과 한라산에 이어 가을 단풍 3대장으로 손꼽히는 호남의 명산이다. 전라남·북도를 아우르는 내장산의 산자락이 장성으로 이어진 곳에 백암산이 있다. 국립공원공단 내장산국립공원백암사무소가 자리한 곳으로 천년고찰 백양사를 품고 있다. 백양사 단풍은 내장산 일대에서 단풍 곱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곳인데 10월 말부터 온 산을 울긋불긋 물들이던 단풍 물결이 백양사에 내려앉으면 전국에서 찾아온 단풍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백양사에 단풍 소식이 전해질 무렵이면 인근 산동네 감나무 밭에는 온통 주황빛으로 잘 영근 대봉감 수확이 한창이다. 남도에서 일명 장두감으로 불리는 대봉감을 수확하고 나면 본격적인 백양사 단풍놀이철이 시작된다. 장성 황룡강변에서 열리던 노란꽃축제가 끝날 즈음에 백양사 단풍잔치가 벌어지는데, 북하면에서 백양사로 들어서는 가로수길 입구부터 오색 단풍들이 고운 자태를 뽐내며 여행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10월 말에 찾아 온 백양사 단풍은 2~3주 동안 이어지는데 11월 초순이 가장 절정이다. 단풍이 곱게 물들기 위해서는 하루 일교차가 크고 햇볕을 충분히 받아야 하는데 백양사 단풍은 이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 백암산은 아기 손처럼 작고 앙증맞다고 해서 ‘아기단풍’이라고 불리는 토종 단풍나무가 전국에서 유일하게 자생하는 곳이다. 그래선지 다른 지역의 단풍보다 잎이 작고 얇은 것이 특징이다. 덕분에 가을 햇볕을 충분히 받을 수 있고, 해발 700m가 넘는 백암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어서 일교차가 큰 것이 백양사 단풍이 고운 이유다. 


<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더 고운 백양사 단풍 >

백양사 인근이라면 어디든지 단풍 구경에 부족함이 없다. 개인적으로 백양사 단풍이 가장 아름다운 곳을 꼽자면 백양사 매표소에서 백양사 앞 쌍계루까지 약 1.5km의 가로수 길이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된 명품숲길로 봄에는 벚꽃, 가을에는 단풍으로 유명하다. 단풍철에는 차량 이동이 쉽지 않으니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싸목싸목 걸어서 단풍구경하는 것이 가장 좋다. 최근 자동차와 사람들이 함께 다녔던 길 옆으로 나무 데크 산책로가 별도로 설치되면서 편안하고 안전하게 단풍 트랙킹을 즐길 수 있게 됐다. 


사진작가들이 자주 찾는 단풍 포인트는 백양사 다리 앞에 있는 쌍계루다. 백양사 앞을 흐르는 두 개의 계곡이 합류하는 지점에 세워진 이층 정자다. 쌍계루는 계곡물에 비친 단풍과 백암산 백학봉의 빼어난 절경을 한 장의 사진에 모두 담을 수 있어서 출사 명당으로 손꼽힌다.


< 쌍계루 단풍 >

해발 741m의 백암산 동쪽 기슭에 자리 잡은 백양사는 백제 무왕 때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원래 백암사였던 것이 조선 선조 때 환양선사에 의해 백양사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 배경에는 흰 양이 등장한다. 전설에 따르면 환양선사가 백양사 옆 영천굴에서 법회를 열었는데 흰 양이 나타나 설법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법회가 모두 끝나고 환양선사가 꿈을 꾸었는데 흰 양이 나타나 '자기가 원래는 하늘에 사는 천인으로 죄를 지어 짐승이 되었는데 선사님의 설법을 듣고 다시 천인으로 환생하게 되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환양선사가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암자 앞으로 나가보니 흰 양 한 마리가 죽어 있는 것을 보고 사찰의 이름을 백양사(白羊寺)로 바꾸었다고 한다. 다른 전설로는 환양선사가 대웅전에서 법화경을 설법할 때 산에서 산양들이 많이 내려와 경청하는 것을 보고 백양사라 바꿨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떤 전설이 맞는지는 환양선사만이 알 수 있겠지만 그 분의 설법에 양들마저 귀 기울였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 같다. 


< KBS 남도캠핑원정대 '별똥별' 촬영 현장 - 천년고찰 백양사 >

 

백양사의 대문 역할을 하는 쌍계루를 지나 작은 다리를 건너면 오른쪽에 부도탑들이 모여 있다. 그 중에 ‘이뭣고’ 탑이 시선을 끈다.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만암 대종사가 던진 화두로 ‘태어나기 전에 나의 참 모습은 무엇인가?’라는 의제를 의심하기 위해 던진 말이라고 한다. ‘이뭣고’, 만암 대종사가 경상도 분이었나 보다. 

현존하는 주요 건물들 중에는 환양선사가 세웠다고 전해지는 극락보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32호)이 가장 오래되었고 극락보전 내부에는 2020년에 보물로 승격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보물 2066호)이 모셔져 있다. 이 외에도 소요대사탑, 사천왕문, 각진국사 진영, 아미타회상도 등의 보물급 문화재가 수두룩하다.

  특히 백양사는 부처를 모시는 공간뿐 만 아니라 지역 토속신앙을 위한 공간도 마련돼 있다. 부처를 모시는 대웅전 옆으로 백암산의 산신을 모시는 칠성전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칠성전은 해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앞두고 특별 기도회가 열리는 장소다. 서로의 다름을 틀림으로 대하지 않고, 종교에 구애 없이 복을 기원하고 싶은 중생들의 마음을 품어준 천녀고찰의 기품이 느껴지는 곳이다. 


백암산은 단풍철이 아니라도 사계절 내내 산행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울창하게 우거진 아름드리 숲길을 산책하듯 걸어도 좋고, 내친 김에 정상까지 올라가서 탁 트인 정상의 아름다움을 누려 봐도 좋다. 다만 정상 산행을 결정했다면 등반 준비를 꼼꼼히 해야 한다. 명승으로 지정된 백학봉·상황봉 같은 기암괴석 지대가 곳곳에 있고 정상까지 오르는 산길이 생각보다 가파른 오르막길이어서 등산 장비를 제대로 갖추고 올라야 한다. 


정상 등반 대신 백암산 숲속 산책을 즐기고 싶다면 백양사 건물 뒤편으로 이어진 ‘비자나무숲길’을 걸어보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백양사 비자나무숲길’은 전국에서 가장 넓은 규모의 비자나무숲으로 7천 여 그루의 비자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겨울에도 푸른 숲길이 펼쳐져 있는데 천연 항균 효과가 높고 향이 좋아서 걷기만 해도 건강해지는 기분이 든다. 


비자나무숲길을 따라 10분 정도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약사암’ 가는 길이 나타나는데 백암산 산행의 매력을 짧고 굵게 느낄 수 있는 등산로다. 약사암까지 거리는 1km 남짓밖에 되지 않지만 가파른 산길을 오르다 보면 금세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하지만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하지 않나. 후들거리는 다리를 달래가며 20여 분 정도 묵묵히 오르고 나니 그림같은 비경이 펼쳐진다. 절벽 위에 오롯이 서 있는 약사암에서는 오색 단풍숲에 안긴 백양사가 한 눈에 들어온다. 예부터 이름 높은 스님들이 거쳐 갔다는 약사암 앞마당에는 5백년 가까이 한자리를 지켜온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있는데 11월 말이면 환한 횃불을 밝혀놓은 듯 샛노란 은행잎들이 아름다운 비경을 선사한다.


< 약사암 영천굴과 영천수 >

약사암까지 올라갔다면 바로 옆에 있는 영천굴에 꼭 들러야 한다. 영천굴은 영천수라는 약수가 나오는 동굴로 조선 후기 호남지역에 유행병이 돌았을 때 영천굴의 영천수를 마시고 많은 사람들이 병이 나았다고 한다. 그 이후로 무병장수 약수로 이름나면서 <영천굴 영천수>는 약사암의 명물이 되었다. 백암산 암반에서 솟아나는 샘물로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으며 시원하고 달큰한 맛이 약수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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