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기다림을 연습한다
컵라면 3분, 로켓배송 하루, 직구 일주일…짧은 기다림이 익숙한 세상을 살고 있다.
되도록이면 기다리지 않는 쪽을 택하는 게 현명하다 여기는 요즘, 기다림이 미덕이라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육아는 기다림이 전부, 기다림이 미덕이라는 생각을 한다.
아이가 태어나서 앉고 서고 걷기까지는 꼬박 1년이 걸린다.
안겨만 있으려는 껌딱지 같은 아이가 스스로 발걸음을 떼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다.
당겨 지기도 늦춰 지기도 하지만, 가만히 누워만 있던 아이가 두 발로 땅을 딛고 서기까지는 충분한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 스스로 중력에 맞서 땅을 딛어낼 때까지 몇 백 번이고 넘어지고 일어나며 손잡아주고 일으켜주는 지칠 줄 모르는 지지가 필요하다.
아이와 말 다운 말로 소통을 하기까지 빠르면 2년이 걸린다.
말을 못해 답답한 아이와 알아듣지 못해 답답한 부모의 속터지는 18 18 18개월을 지나야만 아직 완벽하진 않지만 그 어떤 말보다 아름다운 세살배기의 말 세계를 만날 수 있다.
똑바로 눈을 맞추기만 해도 설레던 부모는 이제 이름을 부르면 알아듣고 바라봐 주기를 기다린다. 보고 활짝 웃어 주기만 해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던 부모는 말뜻을 알아듣고 움직여 주기를, 그러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해주기를 원한다. 아이를 향한 기대와 욕심은 매일 커진다.
어버버 하는 아이가 마냥 귀엽던 시절이 있었는데, 엄마가 어버버 하더라도 똑부러지게 알아듣고 스스로 척척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아이를 들볶는 때가 온다.
기저귀를 떼고 화장실에서 스스로 소변을 보기까지 3년, 대변을 보고 스스로 뒤처리를 하기까진 5년이 넘게 걸린다.
아이가 하나이던 시절, 모든 감각에 예민했던 첫째 아이는 기저귀를 18개월 즈음 떼었다.
아직 말을 하기 전에 기저귀를 떼는 바람에 아이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해 바닥에 소변을 봐 버린 날이 많았고, 밤기저귀부터 떼는 바람에 이불에 실수를 한 날도 부지기수였다.
차라리 늦게 떼었으면 어땠을까 싶을 정도로 셀 수 없이 자주 이불 빨래를 하고 젖은 바닥을 청소하면서 '나는 어쩌면 아이의 뒤처리를 하기 위해 지어진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괴로운 밤들이 길었다.
아이가 둘이 되자, 나는 아이의 뒤처리를 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 분명함을 알았다.
하나의 뒤처리를 해내고 나면 기다리고 있는 다른 아이의 엉덩이를 보면서, 앞으로 몇 번이나 이걸 해내야 할지 까마득한 시간을 체감했다.
뿐만 아니다. 아이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챙기고 가꾸는 일부터, 글을 읽고 쓰는 것, 생활에 필요한 여러 기술을 익히기까지 가르치고 기다리는 시간도 필요하다.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나면 세상이 돌아가는 수많이 이치, 현상, 가치, 의미와 같은 때로는 명료하고 때로는 너무도 불분명해 아직 나도 모르는 문제에 대해 답을 해주어야 하는 물음표 살인마의 순간들이 온다.
열심히 설명하지만 얼마나 아이의 머리와 마음에 가 닿았는지 알 수 없어 수없이 다시 이야기하고 확인하며 아이가 스스로 그 문제에 답을 가지고 오기까지 고요한 기다림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렇게 여러 면면에서 그만큼의 충분한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정말이지 거짓말처럼 아이는 자라있다. 내가 안달이 나 발 동동 거리는 모습이 무색하게끔 훌쩍.
알려주고 바라던 것보다 훨씬 더 크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무엇보다 기대하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해낸다.
어쩌면 기다리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킨 그 경계가 아이의 더 큰 성장을 방해했을 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좀 빠르게 움직이지 않는다고, 많이 흘리고 묻힌다고, 더럽히고 실수한다고 아이가 자라지 않는 게 아니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내가 밀고 끌어서 아이가 그 자리에 와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 그 자리에 가 닿을 시간이 이미 정해져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정말 몰랐다.
첫째 아이를 기르며 나는 충분히, 느긋하고 여유롭게 그리고 침착하고 상냥하게 기다리지 못했다.
항상 조급했고 그래서 내 속도와 시간에 맞추어 아이를 채근하곤 했다.
내가 시계 바늘을 아무리 이리 움직이고 저리 움직이더라도, 시간은 정박대로 흐르고 있는데 말이다. 항상.
아이가 제대로 말을 하며 나의 태도에 대한 반응을 표현한 말들에 놀랐던 기억들이 생생하다.
엄마가 하는 ‘빨리’라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두근거린다고 했다.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 아닌 스트레스의 표현이었다. 그러면서 ‘엄마 마음만 있어? 내 마음도 있는 거잖아’라고 했을 때 받았던 충격을 아직 잊지 못한다. '엄마는 맨날 바쁘잖아' 라며 할머니를 불러달라고 했던 날의 충격도 마찬가지다.
이 아이를 6년 가까이 키우며 나는 정말 내가 이 아이를 키웠나 할 때가 많았다.
그저 이 아이가 자라오는 걸 옆에서 조용히 바라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었던, 해야 했던 거의 전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많이 한다.
그러다보면 나의 정성스럽고 지칠줄 모르는 채근과 독촉에도 자기 페이스를 찾아간 이 아이의 줏대에 감탄하고 또 감사한다.
그렇게 나는 첫째 아이의 6년 육아에서 기다림을 배웠다.
둘째 아이를 키우는 마음과 태도의 가장 큰 근간이 달라졌다.
- 이 아이만의 시간이 있음을 믿는 것 -
내 생각보다 좀 빠르면 신기해하고, 조금 느리면 가만히 바라본다.
아이의 성장에 있어 감독이 아니라 동료가 된 기분이다.
응원하고 함께 기뻐하며 또 슬퍼한다.
요즘 잘 자고 잘 놀던 아이가 많이 울고 잘 자지 못하고 안기려고만 한다.
예전 같았으면 ‘왜 그래’ 하며 아이의 행동을 교정할 방법을 폭풍 검색했을 것이지만, 이제는 가만히 아이를 안아주고 토닥여준다. ‘힘들지? 괜찮아. 지나갈 거야.’ 말해준다.
나도 놀랄만큼 다정하고 상냥한 목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관찰하는 첫째를 본다.
그 시선을 느끼며 첫째 아이를 바라보고 다가가는 마음도 달라진다.
미안함을 베이스로 한 새로운 기다림의 시작.
'엄마가 달라질게'
사실 컵라면 3분도 기다리기가 쉽지 않은 내게 기다림의 미학, 미덕을 제대로 알려주는 육아는 내 인생에서 끊임없는 자기계발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