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자리에서, 너는 너의 자리에서
⁕ 덧붙이는 이야기 ⁕
1. 아버지
다혈질에 목소리도 크고 우락부락한 이 경상도 아저씨는, 딸에게 지극정성이라는 반전 매력이 있었다. 딸은 그를 닮은 구석이 꽤 많아서 둘은 잘 맞을 때도 많지만 다시는 안 볼 사람들처럼 싸울 때도 있었다. 어쨌든 그들은 상당히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의 딸 마음속에는 두고두고 남아있는 목소리가 세 개 있다고.
“니 마음속에 일곱 빛깔 무지개가 들어 있다고 생각해 봐라. 빨간색부터 시작해서 가장 안쪽에 보라색. 앞으로 니가 만나는 사람에 따라서 누군가에게는 빨간색이나 주황색 마음까지만 보여줘도 된다. 아무한테나 무턱대고 마음을 다 보여주는 것이 최선은 아니라는 소리다. 누군가에게는 파란색까지. 가장 안쪽에 있는 보라색은 아무한테도 안 보여줘도 된다. 부모한테도 말 안 해도 된다. 니 혼자 간직해라. 너를 지켜라.”
(열일곱 살 한여름 밤. 학교 운동장에 앉아서)
“남자를 만날 때, 금마가 하는 말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라. 때로는 귀를 닫고 금마의 행동과 눈빛만 함 봐라.”
(스물한 살 봄. 자취방 식탁에서)
“니는 니 자리에서 니 할 일이나 해라. 나는 내 일을 한다.”
(언젠가 여러 번)
2. 큰아버지
예순이 넘은 아버지가 여전히 응석 부리고 장난치며 좋아하던 형.
아버지와 달리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않으셨고 식사는 채식 위주로, 운동도 챙겨서 하셨다. 엄마가 늘 아버지에게 형님처럼만 해 보자고 했었다. 어느 날은 첫째 돌이 지난 것도 몰랐다며 내게 용돈을 챙겨주셨다. 그랬는데…. 얼마 전 갑자기 하늘의 별이 되셨다.
그날, 그분의 따뜻한 음성이 아직도 내 귓가에 있는데….
‘그래 아우야’라며 다정히 불러주시던 형님이 가시자 아버지는 이제는 전화할 곳이 없다고 했다.
3. 시아버지
남편의 입대를 앞두고 연애를 시작했었다. 입대를 앞둔 이십 대 초반의 정서 상태는 매우 불안정했다. 어떤 날은 애틋했고 어떤 날은 집착했다. 그래서 나는 그와 헤어져야 할지 고민도 많이 했었다. 그래도 고무신을 거꾸로 신기에는 미안했다. 면회에 나섰다. 우연히 그의 아버지를 만났었다.
군인의 집착이 심해져 가던 어느 날, 나는 참다 참다 그의 아버지에게 다짜고짜 연락했었다. 당신 아들이 이러한 행동을 하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며.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웃기다. 남자 친구의 아버지에게 연락할 생각을 왜 했었을까?
어쨌든 그렇게 그의 아버지와 연락을 시작했었다. 그런데, 연락하면 할수록 이분의 아들이라면 내가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멋진 삶을 사신 분이었다. 그랬던 분이 요즘은 방 안에서만 계신다. 움직이는 것도, 말하는 것도 어려워하신다. 벌써 여러 해 지났다.
억장이 무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