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홍콩의 책 읽기 모임

홍콩북클럽 서울 소모임도 현재 진행형

by 작은별

외국살이를 할 때면 소소하지만 없어서 아쉬운 것들이 종종 있다. 우리나라의 의료보험제도나 치안 수준, 바닥난방과 놀라운 택배 시스템 등의 거창한 것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지난 홍콩살이를 떠올려보면 나는 요리를 할 때마다 그렇게 대파가 아쉬웠고 (대형 마트에서만 팔고 가격도 비쌈) 마음이 허전할 때에는 우리말로 된 종이 책이 그리웠다. 이전 에피소드에서도 밝혔지만 남편에게 그런 품목은 ‘내수용’ 라면이었던 것 같다. 고국의 누군가에게 택배 배송을 부탁할 때, 우리의 희망 물품 목록에는 늘 파와 라면, 책 몇 권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린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최근에는 집에 책이 꽤 많아졌다. 아이들은 처음 만난 책을 물어뜯고, 먹고, 기찻길을 만들거나 블록 쌓기를 하며 논다. 조금 더 자라니 엄마 또는 아빠의 무릎에 앉아서 책 읽는 시간을 인지하기 시작하고. 시간이 꽤 흐르며 첫째 아이는 이제 혼자서 책을 펴 놓고 이야기를 중얼거린다. 아이는 이제 다섯 살이지만 나는 한글 교육에 적극적인 편은 아니다. 옆에서 관찰해 보니 그림을 보며 아이만의 상상 속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모습도 꽤나 좋아 보이기 때문이다. 아, 이제 돌이 지난 둘째는 여전히 책을 먹고 찢다가 아빠에게 혼나곤 한다.


그런데 문득 이 아이들이 과연 언제까지 책에서 즐거움을 찾을까 싶다. 서점에는 종이 책이 넘쳐나고 휴대폰이나 태블릿을 통해 전자책도 흔히 접할 수 있는 시대이지만 아이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더 재미있는 무엇인가도 참 많다. 아이들이 오랫동안 종이 책을 가까이하기를 바라는 나는, 라떼 시절의 꼰대 엄마인 걸까.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 세상에서의 창의적 혁신 가능성을 차단하는 걸까. 잘 모르겠다. 어쨌든 아이들에게 종이 책이 사랑받기가 참 힘든 세상인 것은 분명하다.




홍콩 살이 선배들이 지혜를 전해주는 카페를 열심히 들락거리던 어느 날 ‘책 읽기 모임’ 모집 글을 읽게 되었다. 지금은 그 글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글 자체가 좋았다. 뭐랄까 작성자가 조심스럽게 글을 올리는 듯하면서도 편안하고 따뜻한 모임을 이끌어 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온라인을 통한 만남에 적극적이지는 않았으나 마침 누군가와의 수다가 그리웠고 무엇보다 책도 읽는다고 하니 당장 참여하고 싶었다. 대학 시절 과제를 위한 조모임 이후 몇 년 만의 ‘모임’인가. 초등학생 논술 수업도 아니고 책 읽기 모임이라니, 뭔가 조금 웃기기도 했다. 용기를 내어 작성자에게 쪽지를 보냈다. 드디어 설레는 마음으로 첫 모임에 달려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홍콩의 책 읽기 모임 참여는 홍콩 살이 시절 내가 가장 잘한 일이었다. 이 모임을 통해서 만난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들. 당연히 배경, 취향, 성격, 말투, 나이, 성별, 정치적 관점이나 패션에 관한 관심까지도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만났지만 모두가 반짝이는 별이었다. 그들의 여유와 배려는 서로를 편하게 해 주었다. 덕분에 나는 각자의 다름을 즐겁게 관찰하고 배울 수 있었다. 서른 즈음의, 인생 새내기였던 나에게는 얼마나 소중한 기회였던지. 그리고 정보가 가득했다. 역시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면 정보가 흐르는구나,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정보는 또 다르구나를 많이 느꼈었다. 이곳에서 얻게 된 소중한 정보 덕분에 나의 홍콩살이는 한층 윤택해졌다. 한국 반찬을 정기배달로 얻어 드디어 남편에게 육개장과 순대볶음을 먹였다. 아트 바젤의 VIP 티켓을 손에 쥐고 첫째 아이를 유모차에 태운 채 설명을 들으며 전시를 관람했다. 맛집 공유나 물품 나눔도 당연히. 홍콩 시위가 한창일 때에는 기습 시위와 경찰 이동 정보 등도 있었던 것 같다.


누군가는 새롭게 참여하고 정든 이는 떠나며 모임 때마다 구성이 조금씩 바뀌었지만 이 또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잘 진행되었으니, 내 생각에 이것은 전적으로 모임장 덕분이었다. 모임장은 본인이 구성한 책 읽기 모임에 엄청난 책임감을 가지고 참 단단하게 이끌어주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소중한 시간을 내어 북클럽 리더 교육, 토론 교육 등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책 읽기 모임 덕분에 읽어 내려간 책들은 당연히 좋았다. 하지만 혼자서 책 읽기만 했다면 그저 내 속에 머물러 있었을 생각들이 다른 이들의 해석을 만나며 새롭게 확장되는 것, 책 읽기 모임의 핵심을 경험한 것이 더욱 좋았다.


“육아서는 제외하도록 해요. 아이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나 자신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예요.


첫 모임에서 어떤 분이 말씀하셨다. 당시 나는 아이가 없어서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으나 필요한 관점이라고 여기며 금세 수긍했었다. 모임에 어떤 엄격한 규칙은 없었다. 그래도 초반 몇 회 동안 암묵적으로 지켜진 것이 있었는데, 본인이 말하지 않는 한 서로의 나이, 직업, 가족 사항 등 개인정보에 관해 묻지 않았다. 오로지 책에 집중하며 무슨 책을 읽었는지, 그 책을 읽으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 다음에는 무엇을 같이 읽고 싶은지 등의 이야기만 나누었다. 참으로 생산적인 모임이지 않은가. 흔히들 모이면 이름을 밝히고 난 다음 서로의 나이와 출신학교 또는 지역, 가족 구성 현황 등을 공유하는 소위 호구조사를 하고, 모임의 취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는데 말이다.


하지만 모임이 오래 지속되자 서로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고 나이에 따른 서열도 자동 정리되었다. 나는 이 모임에서 막내였고 홍콩 살이 내내 유일했던 나의 동갑내기 친구도 한 명 사귀게 되었다. 이 친구와는 감사하게도 비슷한 시기에 임신과 출산을 경험했다. 뱃속에 있던 아기들이 세상으로 나와 서로 처음 만나게 되었을 때 얼마나 신기했던지. 구는 요즘 나의 든든한 홍콩 특파원으로 글쓰기와 팩트체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임신과 출산, 육아를 겪으며 나의 모임 참여도는 현저히 낮아졌지만 어쩌다 한번 나타나도 반갑게 맞아주는 분들 덕분에 쑥스러움 없이, 일정만 가능하다면 최선을 다해 달려가곤 했다. 아이와 함께 홍콩에 있을 때는 아이를 돌보아줄 사람이 없어서 부득이하게 데리고 가야 했다. 이조차도 그들은 너그러이 이해해 주었다. 첫째는 책 읽기 모임의 최연소 참가자가 되어 다른 분들의 품에서 토론에 참여하고 울고 똥을 쌌다. 책 읽기 모임은 더욱 발전해서 소소한 이벤트도 종종 열었다. 고국의 떡볶이를 그리워하는 모임원을 위한 분식 데이가 가장 인기 많았다. 다 함께 네 글자의 홍콩 누아르 영화를 보기 위해 무비 데이도 정했다. 간식을 가득 안고 어느 아파트 클럽하우스의 영화관으로 향던 날, 얼마나 신났던지.



워낙 이동이 잦은 도시에서 만났기 때문이었을까. 책 읽기 모임의 구성원들은 어디론가 종종 떠났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나처럼 돌아온 사람들도 꽤 있어서 홍콩 북클럽의 서울 소모임도 현재 진행형이다. 홍콩보다는 서울이 더 넓고, 서울에 머무르지 않는 이들도 있어서 모두 함께 만나기란 쉽지 않지만 그래서인지 고국에서의 만남이 더 반갑다. 이번에는 둘째의 출산과 육아, 그리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습격으로 나의 출석률이 또 저조하다. 그래도 모임에서 공지하는 책들을 부지런히 따라 읽고 그들과 함께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린다. 둘째가 부디 어린이집에 잘 적응해주기를. 드디어 나도 북클럽 모임에 성실히 참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