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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멈춘 날

나는 나의 자리에서, 너는 너의 자리에서

by 작은별

건강검진업계의 샤넬 같은 곳이라고 했나. 서울대학교 병원이 강남에서 운영하는 건강검진센터 말이다. 건강검진이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니다. 분명 두어 달 전 건강검진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는데 갑자기 심각한 병을 발견했다는 사례를, 우리는 종종 접하곤 한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검진 항목 자체가 원인은 아닐 것이다. 각 병원이 보유하고 있는 장비, 그리고 단계별로 투입되는 의료진의 수준 차이가 핵심이겠지.


그즈음 친정아버지는 자꾸만 여기저기가 아프다고 했다. 한동안은 역류성 식도염인 것 같다며 집 근처 병원에 다녔다. 병원에서는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하지만 영 불편하다고 투덜투덜. 또 어느 날은 가슴이 타는 것 같다고 하고. ‘병원에서는 괜찮다고 하는데.’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기분이 별로였다.


“아부지,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예약 좀 해 보세요. 내가 해드릴까?

“됐다 마. 뭐하로 거기까지 가노. 대구에도 병원 쌨다.

“맞는 말씀이긴 한데. 아부지도 아는 내 친구 S 있잖아. 가가 카는데 거기가 확실히 다르긴 다르다 하대. 서울에 돈 많은 사람들은 그런데 간다 카더라. 건강검진비가 엄청 비싸긴 하더라. 내가 돈을 딱 내 드리면서 이런 소리를 해야 되는데… 그건 죄송하네.


아버지도 아는 내 친구 S. 드디어 전문가를 들먹이며 슬슬 압박 작전을 시작했다. 내가 예약을 해 둔다고 병원에 가실 분이 아니었다. 공부 좀 하는 아이들이 전국에서 모여든다는 고등학교에서 1등을 3년 내내 거의 놓치지 않았던 전설적인 친구. 그는 결국 서울대 의대에 순조롭게 진학했고 심지어 그곳에서도 성적이 좋았다. 사람들은 종종 이런 아이들이 인간미가 없고 뭔가 치명적인 결함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신은 불공평하게도 그에게 모든 것을 다 주었다. 매우 인간적이며 유머까지 겸비. 음악적 재능도 좋고 외모도 준수한 편이라 대학 시절 내내 주변이 분주했다. 사람들은 그가 요즘 인기가 많다는 안과나 피부과, 정형외과나 재활의학과로 갈 것이라고 예상했었지만 그의 선택은 기피 대상이라는 흉부외과였다. 장하다 친구야. 암튼 그와 나는 고등학교 3년 동안 학생회 활동을 같이했던 덕분에 다소 친하게 지냈고 대학 이후에도 종종 만났다. 기회가 닿아 부모님께서도 친구와 만난 적이 있었다. 친구는 부모님의, 부모님은 친구의 안부를 묻곤 했다.


예상대로 아버지의 마음이 조금씩 움직였다. 전화 한 통 해 보시겠단다. 8월의 마지막 주에는 엄마와의 홍콩행이 예정되어있으니 그 이후로 예약을 잡겠다고 하셨다. 예약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던데. 뭐 그때쯤이라도 되면 좋겠네, 라며 통화를 마치려다가 혹시라도 취소된 건이 있으면 그전에라도 날짜를 잡아보시라고 했다. 며칠 후 아버지께서는 홍콩 가기 한 주 전에 취소건이 있어서 예약했다고 하셨다. 여름휴가 기간이다 보니 갑자기 일정을 바꾸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고 하시면서.


“잘됐네~ 일단 건강검진부터 해놓고 홍콩에 와서 결과를 들으시면 되겠어요. 그럼 나는 여행 일정표를 만들어볼게요.”




“내가 홍콩에 못 가지 싶다.

“왜? 다음 주인데?

“아직 검사 결과가 나올 때가 아닌데 강남센터에서 갑자기 연락 와서 지금 좀 오라 카네. 너거 엄마랑 기차 타고 가볼라고.

“무슨 일 이래?”

“그건 다시 전화할게.


검사 후 삼사일 정도 지났던 것 같다. 부모님은 부랴부랴 상경해서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그날 바로 혜화에 있는 본원으로 가서 입원 수속을 했다. 최대한 빠른 날로 수술 날짜가 정해졌다. 건강검진에서 심장 쪽 혈관이 심각하게 막혀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저승사자와 인사를 나누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결과를 살펴보던 의료진이 긴급하게 연락했고 운이 좋게도 본원에 병상 자리가 있어서 그날 바로 연결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혜화동으로 데려다주던 택시 기사는 진료받기도 어려운 병원에 오래전에 예약하셨나 보다고 말했다고. 엄마는 너무나 황망했지만 그 어렵다는 병원에 다행히 바로 연결되어서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고 읊조렸다 했다. 그리고 손이 덜덜 떨렸다고 했다.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서울에 있었다면 당연히 달려가서 일 처리를 도맡아 하고 하다못해 떨고 있는 엄마 손이라도 잡아줄 텐데. 아버지를 꼭 안아줄 텐데. 그러고 보니 엄마 손을 언제 마지막으로 잡아보았는지, 아버지를 언제 마지막으로 안아주었는지 - 내가 안겨보았는지 - 기억이 나지 않았다. 혼 후 30년이 넘도록 불같은 남편 그늘 아래에서 살금살금 지내던 엄마가 차분히 보호자 노릇을 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었다.


“비행기 타고 서울 갈까?

엄마에게 물었다. 옆에서 듣고 계시던 아버지가 바꿔달라 하시더니 말씀하셨다.

“니는 니 자리에서 니 할 일이나 해라. 나는 내 일을 한다.”




수술 날이 되었다. 오전에 들어가서 저녁때 나온다는 대수술이었다. 보호자로서 서명해야 하는 수많은 서류. 엄마는 손을 덜덜 떨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이름을 적었다고 했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무서운 말이 너무 많아서 읽어보기도 버거웠다고 했다. 참, 니 S한테 연락은 함 해봤나.


S에게 연락. 서로의 삶이 바빠 가장 마지막에 만났던 것이 나의 결혼식장이었다. 그는 벌써 한 아이의 아빠가 되어있었다. 그 정도까지만 소식을 알았다. 요즘도 혜화에 있는지, 레지던트 몇 년 차일지, 아니면 군의관으로 갔는지 알지 못했다. 아버지가 생과 사의 기로에 서 있었다. 예전에 서울대병원의 강남센터에 관해서 이야기해 준 것도 그였다. 연락. 그런데 나는 며칠 동안 고민했다. 가족, 친구, 지인, 건너 건너 아는 사람 등등. S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다양한 연락 또는 부탁을 받을 것이었다. 그 대열에 내가 합류하고 싶지 않았다. 흉부외과 레지던트의 일상을 잘 알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 반, 그리고 나머지 마음 반은, 우습게도 내 자존심이 상했다. 지금도 그때의 그 마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그랬다.


결국, 수술 하루 전날에 메시지를 보냈다.

‘너에게 어떤 도움을 부탁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이러한 상황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타국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보니 오히려 더 속이 쓰리다.’


나의 메시지를 받은 친구는 아버지의 성함과 생년월일을 알려달라고 했다. 담당 교수님과 선생님들이 좋으신 분들이니 걱정하지 말라며 안심시켜주었다. 기회를 봐서 아버지 병실로 한 번 찾아뵙겠다고 했다. 고마웠다.




그날 나는 남편을 회사에 보내 놓고 휴대폰만 손에 쥐고 있었다. 시간이 멈춘 날이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날이었다. 아버지는 3남 2녀 중 넷째였다. 둘째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막내 고모와 고모부께서 병원으로 달려와 엄마 곁을 지켜주셨다. 막내 고모부는 목사님이고 그분들은 모두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엄마는 무릎이 닳도록 절에서 삼천 배를 하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그분들 모두와 잘 지내고 있지만 가끔 종교문제는 불편해했다. 다행히 수술실 앞에 선 엄마는, 목사님께서 오셔서 기도해주시니 더욱 든든하다고 했다.


아버지 그늘 아래에서 살금살금 지내던 엄마와 달리 큰어머니께서는 대장부 스타일이셨다. 나는 어린 시절 할머니와 함께 여름마다 큰댁에 가서 사촌들과 함께 놀았기 때문에 커서도 큰어머니와 꽤 자주 연락하는 가까운 사이였다. 아버지를 수술실에 보내고 엄마가 내게 전화를 했다. 나는 큰어머니를 바꿔 달라고 했다.


“그래.


흔들림 없고 든든한 큰어머니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참고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먼 길 달려와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엄마 잘 부탁드립니다.’

고모에게도 감사하다고 전했고, 큰아버지와도 통화했었다.


남편이 전화했다. 뭐 좀 먹고 영화라도 틀어놓으라고 했다. 고맙다고 말하고 그냥 누워 있었다. 수술이 늦어지고 있었다. 하루 종일 물 한 모금 못 마신 엄마는 나올 때가 훨씬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다며, 무슨 일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발을 동동 굴렀다. 고민하다가 S에게 또 연락했다. 상황 좀 알아봐 줄래.


그는 수술은 잘 되었고 마무리 중인 것 같다며 알려주었다. 엄마에게 전했다. 하루 종일 침착함을 잃지 않았던 엄마는 그제야 ‘조금 더 일찍 좀 물어봐 주지!!!’ 라며 폭발하듯 소리쳤다.


수술방에서 나온 아버지는 중환자실로 갔다.




처음 눈을 떴을 때, 흰옷을 입고 얼굴도 흰 어떤 분이 있었다고 했다. 마취에서 깨어날 때쯤 간호사가 앞을 지키고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눈을 뜨고 처음 본 그 얼굴이 하늘나라의 천사인 줄 알았다고 했다. 아, 내가 결국 올라왔구나, 싶었다고.



지난여름에는 손녀 사진도 열심히 찍어주셨다. 이 사진은 남편이 찍고.



다행히도 그렇게 살아나셨다. 회복은 오래 걸렸다. 그래도 5개월 후에는 마침내 홍콩과 마카오에 다녀가셨다. 2년 반 정도 후에는 나와 함께 미국에도 갔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여전히 긴장 중이긴 하지만 오늘 하루도 엄마와 별일 없이 투닥거리며 보낸 것 같다. 외할머니께서는 당신의 둘째 사위가 다행히 살 운명이었던가 보다고 하셨다.


수술 다음 날 S가 병실로 찾아뵙고 싶은데 자신이 도착하면 너무 늦을 것 같아서 걱정이라고 했다. 알고 보니 그는 얼마 전에 혜화에서 분당 병원으로 옮겼다고 했다. 엄마와 내가 괜히 마음 쓰일까 봐 말하지 않았더랬다. 혜화에 있는 자신의 선배들에게는 친구의 아버지를 잘 부탁드린다고 말하고 매번 확인했던 것 같았다. 이야기를 전하니 부모님께서는 안 와도 된다고, 참 고맙다고 하셨다. 어떻게 마음을 표현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의 아이를 위한 장난감과 그의 아내를 위한 차와 다과 등을 포장해서 엽서와 함께 보냈다.




남편은 장인어른의 수술이 잘 되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기뻐했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 아빠도 그날 수술이 잘 되었더라면, 지금 병원이 아니라 회사에 있을 텐데.”


억장이 무너졌다. 그를 안아주었다.



⁕ 덧붙이는 이야기 ⁕

1. 아버지
다혈질에 목소리도 크고 우락부락한 이 경상도 아저씨는, 딸에게 지극정성이라는 반전 매력이 있었다. 딸은 그를 닮은 구석이 꽤 많아서 둘은 잘 맞을 때도 많지만 다시는 안 볼 사람들처럼 싸울 때도 있었다. 어쨌든 그들은 상당히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의 딸 마음속에는 두고두고 남아있는 목소리가 세 개 있다고.

“니 마음속에 일곱 빛깔 무지개가 들어 있다고 생각해 봐라. 빨간색부터 시작해서 가장 안쪽에 보라색. 앞으로 니가 만나는 사람에 따라서 누군가에게는 빨간색이나 주황색 마음까지만 보여줘도 된다. 아무한테나 무턱대고 마음을 다 보여주는 것이 최선은 아니라는 소리다. 누군가에게는 파란색까지. 가장 안쪽에 있는 보라색은 아무한테도 안 보여줘도 된다. 부모한테도 말 안 해도 된다. 니 혼자 간직해라. 너를 지켜라.”
(열일곱 살 한여름 밤. 학교 운동장에 앉아서)

“남자를 만날 때, 금마가 하는 말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라. 때로는 귀를 닫고 금마의 행동과 눈빛만 함 봐라.”
(스물한 살 봄. 자취방 식탁에서)

“니는 니 자리에서 니 할 일이나 해라. 나는 내 일을 한다.”
(언젠가 여러 번)

2. 큰아버지
예순이 넘은 아버지가 여전히 응석 부리고 장난치며 좋아하던 형.

아버지와 달리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않으셨고 식사는 채식 위주로, 운동도 챙겨서 하셨다. 엄마가 늘 아버지에게 형님처럼만 해 보자고 했었다. 어느 날은 첫째 돌이 지난 것도 몰랐다며 내게 용돈을 챙겨주셨다. 그랬는데…. 얼마 전 갑자기 하늘의 별이 되셨다.

그날, 그분의 따뜻한 음성이 아직도 내 귓가에 있는데….

‘그래 아우야’라며 다정히 불러주시던 형님이 가시자 아버지는 이제는 전화할 곳이 없다고 했다.

3. 시아버지
남편의 입대를 앞두고 연애를 시작했었다. 입대를 앞둔 이십 대 초반의 정서 상태는 매우 불안정했다. 어떤 날은 애틋했고 어떤 날은 집착했다. 그래서 나는 그와 헤어져야 할지 고민도 많이 했었다. 그래도 고무신을 거꾸로 신기에는 미안했다. 면회에 나섰다. 우연히 그의 아버지를 만났었다.

군인의 집착이 심해져 가던 어느 날, 나는 참다 참다 그의 아버지에게 다짜고짜 연락했었다. 당신 아들이 이러한 행동을 하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며.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웃기다. 남자 친구의 아버지에게 연락할 생각을 왜 했었을까?

어쨌든 그렇게 그의 아버지와 연락을 시작했었다. 그런데, 연락하면 할수록 이분의 아들이라면 내가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멋진 삶을 사신 분이었다. 그랬던 분이 요즘은 방 안에서만 계신다. 움직이는 것도, 말하는 것도 어려워하신다. 벌써 여러 해 지났다.

억장이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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