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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 학당의 이방인들

친구와 학우 사이

by 작은별

무엇을 보아도 결국 나의 생각과 모습이 반사되어 보이는 거울 빛의 도시.


홍콩에서의 시간이 꽤 흐르고 있었지만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여전히 그 속으로 한 발자국도 더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책 읽기 모임 덕분에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고, 남편 지인들의 초대 덕분에 홍콩에 대해 점점 더 많이 배워가고 있었. 그래도 갈증은 여전했다. 외국인인 나는 또 다른 외국인들과 함께 이방인으로서의 고민과 감정을 공유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남편은 이런 내가 유난스럽다고 했다.


홍콩에서 살아가는 외국인으로서, 나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누리는 유리한 점이 꽤 많다고 생각했다. 선 그 사회의 대다수 구성원과 나의 겉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아서 았다. 물리적 거리가 가까운 만큼 우리나라에 대한 이해도나 호감도도 높았다. 같은 아시아권이다 보니 일상 속 문화 충돌도 적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사회의 일원이 되기가 어렵다고 느끼고 있었으니, 원인 중 하나로 언어를 꼽았다. 영어가 통하는 사회에서는 영어를 무기로 그곳 구석구석을 살펴볼 수 있었다. 스페인어의 세상에서는 스페인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호감을 쉽게 얻었다. 나의 프랑스어는 유창하지 않았으나 빵을 사고 와인을 고르며 택시를 탈 정도는 했었. 덕분에 그곳에서 조금 더 재미있게 살았다고 생각했다. 영어로만 소통하는 일터에서 시간을 보내는 남편과 달리 나는 '홍콩'에 살고 있으니, 유난스럽더라도 중국어를 배워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목적에 맞게 광둥어를 배워야 할 텐데. 나의 고민을 알게 된 사람들은 모두 보통화(普通話)를 배울 것을 추천했었다. 남편의 홍콩인 직장 동료도, 아파트 로비를 지켜주던 관리인도.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홍콩에서 북경어를 하면 무시를 당할 만큼 홍콩인들의 자부심과 광둥어에 대한 애정은 대단했었지만 늘 그렇듯 세상은 급변하고 중국 본토의 영향력은 나날이 커지고 있었다. 나는 외국인이었지만 홍콩이 색을 잃어가는 상황이 여러모로 아쉬웠다. 그래도 표준어를 배우기로 결정하고 홍콩중문대학교 어학원의 저녁 수업에 등록했었다.





저녁 수업의 특성상 학생 대부분은 직장인이었다. 스무 명이 조금 안 되고 백인이 다수였. 영국, 미국, 포르투갈, 호주, 프랑스, 네덜란드, 인도, 파키스탄, 일본, 한국. 선생님은 학생들의 국적을 물어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우리는 두어 번의 만남 후에 서로 어느 나라 사람인지 다 알게 되었다. 홍콩 속으로 한 발짝 더 들어가고자 중국어 수업을 신청했는데 - 당연한 결과였겠지만 - 선생님도(북경 출신), 학생들도 모두 이방인들만 모여있었다.


이방인들로 가득한 중국어 교실은 의외로 재미있었다. 말 많고 유쾌한 인도와 파키스탄 아저씨들 덕분에 교실에는 종종 웃음 폭탄이 터졌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서로 예민한 사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그 아저씨들은 어찌나 잘 지내는지. 반면에 일본인 학생들과 한국인 학생들은 별일 없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서먹했다. 아마 개인의 성향 탓이었겠지만 나는 속으로 미로워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다른 한국인 아저씨와도 그다지 대화를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일 년 넘게 서로 얼굴을 보며 꼬박꼬박 인사는 했고 숙제를 덜 했을 때는 긴급히 도와주기도 했다.


영어나 유럽식 언어에 익숙한 학생들은 중국어를 배우는 데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다. 성+이름순으로 바뀌니 이름을 말하는 것부터 혼란스러워했다. 무엇보다 그림인지 글자인지 알 수 없는 한자가 그들에게는 충격이었다. 성조는 또 어떻고. 말 그대로 멘붕을 겪고 있었다. 당시의 나는 한국인의 강점인 동안미를 뽐내고 있었던 터라, 그들은 내게 쉽게 말을 걸고 도움을 요청하곤 했다. 그들의 학습과 숙제를 도와주며 빠른 속도로 친해질 수 있었기에 내게도 좋은 기회였다. 나 역시 중국어 공부가 힘들었지만 그들의 고군분투를 옆에서 보고 있자니…. 정말 재미있었다. 호호호호. 그들은 한국인, 일본인 학생들이 한자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점과 한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쓱쓱 그려낸다는 사실에 매우 놀라곤 했다.


글쎄. 솔직히 나는 그전부터 유럽의 친구들이 영어, 불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중 두세 개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자괴감을 느꼈었는지 모른다. 그중 하나를 배우는 데에도 얼마나 많은 노력을 쏟아야 했는데. 또, 그들은 내가 영어와 스페인어를 할 줄 안다며 신기해했지만 정작 나는 아시아인이면서 일본어나 중국어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점이 부끄러웠다. 나는 매시간 중국어 교실에 더욱 열심히 참여했다.




하루는 선생님께서 ~의라는 뜻인 的(de)를 가르쳐주며 너의 학우(同学)인지 친구(朋友)인지를 물었다. 이 단순한 질문에 답하는데 학생들은 매우 고민했다. 중국어가 어려워서는 아닌 것 같았다. 어떤 이를 두고는 친구, 누구는 학우라며 구분했다. 친구는 아니지만 학우라는 대답도 많았다. 아마도 성인들의 수업이기 때문이었을까. 갑자기 인도인 아저씨가 말했다.



“아니 이 정도 수업했으면 우리 모두 친구 아니야? 뭘 고민하고 그래?”



어디에선가 또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저씨의 옆에 앉아있던 네덜란드인 언니는 대꾸하지 않았다.

친구가 되려면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까? 문화, 나이, 성별, 성향에 따라 누군가와의 거리를 다르게 설정하는 사람들. 친구는 무엇이며 나는 어떤 친구일까 싶은 사춘기 시절 고민을 다시 들추어보았던 날이었다. 수업을 듣던 그때와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 내가 느끼는 친구의 의미는 또 다른 것 같고.




나는 한 해 조금 넘게 이 중국어 교실에 다녔다. 내가 목표했던 대로 거울 밖으로 한 걸음 나갈 수 있었는지는, 글쎄 잘 모르겠다. 점점 지하철의 안내방송이 들렸고 곳곳에 있는 안내문을 읽으며 남편에게 자랑하곤 했었으니 이제 막 발을 내딛으려던 참이었을까. 하지만 사용할 일이 줄어드니 금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그래도 중국어 교실에서 서로의 타향살이를 응원해주는 많은 ‘친구’를 만들었고 웃고 떠들며 신나게 다녔던 추억이 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싶기도 하다. 여전히 이방인들 속에 있는 이방인이었지만 즐거웠으니 뭐. 그때 인도인 아저씨가 매번 '쉬엄쉬엄 살아~ easygoing~'이라고 말했었다. 참, 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던 날 그가 해 준 조언도 생각난다. 나중에 아기 낳으면 흙도 좀 먹이며 키워야 아토피 같은 거 안 걸린다고. 당시에는 상당히 당황스러웠지만 지나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인 것 같기도 다.


어쨌든 ‘그래도 갈증은 여전했다.’라며 잔뜩 곤두서 있었던 내가 삶이란 그런 것 아니겠냐며 말할 줄도 알게 되었으니. 시간이 흐르고 나이도 먹고 내려놓음도 배우고. 아저씨 말대로 easygoing의 미덕도 인정하며 그렇게 성장하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을 좋아한다던 아저씨. 된장찌개 먹고 선물용 설화수 사 가고 싶다고 했었는데 다녀갔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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