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몽콕 시장을 지나며

Hi, happy girl.

by 작은별

“Inhale~ Exhale~

“Namaste.”


요가 수업이 끝났다. 갑자기 천장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자리에 한참 동안 앉아있었다. 오랜만에 핫요가 수업에 참여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서둘러 집으로 갔다.


그날 이후로 한동안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꼬박꼬박 다니던 요가 교실에도, 중국어 교실에도 빠졌다. 중국어 학당의 이방인들이 고맙게도 무슨 일 있냐며 연락해왔다. 몸이 좋지 않다고 했더니 약은 먹었냐며 걱정해주었다. 서 나와서 숙제하자길래 웃었다.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문득, 혹시, 싶었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임신테스트기를 사 왔다.


두 줄…?

남편에게 사진을 찍어 보냈다. 퇴근길에 꽃이라도 사 오려나 싶었는데 빈손이었다. 어쩜 이렇게 로맨스도 센스도 없는지. 남편은 믿기지 않으니 병원에 다녀오자고 했다. 솔직히 나도 실감 나지 않았기 때문에 바로 동의했었다. 남편은 그새 사무실에서 어느 병원에 갈 것인지를 알아보고 예약해 두었다고 했다. 휴가도 냈다고. 꽃을 들지 않은 모습에 잠시 실망할 뻔했지만, 역시 잘 골랐다, 싶었다.


홍콩의 병원시스템은 우리나라와 달랐다. 매우 저렴하고 상당히 오래 기다려야 하는 정부 병원과 매우 비싸고 신속하게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사립병원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의료진의 수준은 정부 병원이 더 낫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의료 ‘서비스’는 당연히 사립병원이 월등하게 좋았다. 두 곳 모두 예약해야 했다. 간혹 소소한 감기나 피부 발진 등으로 병원을 갈 때는 동네에 있는 GP(General Practitioner)에게 갔다. 만약 이비인후과, 피부과, 안과 등의 전문의(Specialist)를 찾아가야 하거나 상급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GP가 판단하면 의뢰서를 써 주었다. 사립 산부인과는 GP를 거치지 않아도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정부 병원의 산부인과에 환자등록을 하고 진료를 받으려면 GP나 사립병원의 임신확인서가 필요했다. 하혈이나 조산 등 응급상황이 발생할 때는 정부 병원으로 달려가야 하므로 임산부들은 대부분 정부 병원에도 등록하고 진료를 받았다.


의료보험은 회사나 개인이 선택하는 것이었다. GP는 주로 해당 보험사와 연계된 곳으로 갔다. 이 경우에는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나왔다. 보험사가 GP에 바로 지급하기 때문이었다. 정부 병원이나, 보험사가 선정하지 않은 병원으로 갈 때는 일단 병원비를 계산하고 추후 환급받았다. 보험에 따라서 보장 금액이 달랐다. 나는 홍콩과 한국에서 산부인과에 다니는 동안 남편의 회사에서 제공해주는 보험이 보장하는 범위와 그간의 병원비 지출을 잊지 않아야 했다. 약은 해당 병원에서 받았다.




남편이 고른 병원은 센트럴의 오래된 가스 가로등 - 1800년대 후반에 설치되었다는 - 바로 옆 건물에 있었다. 그 건물에 있는 스타벅스는 ‘홍콩 느낌’ 가득한 인테리어로 유명한 곳이었다.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접수 코너에 백인 직원이 둘 있었다. 방문객의 80% 이상도 백인이었다. 홍콩 중심부에 있는 병원에 갔으나 마치 영국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늑하고 친절했다. 남편은 어느 여의사를 나의 주치의로 요청했다고 했다. 그녀는 영국의 의대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홍콩인이었다. 아직은 너무 초기여서 초음파로 확인할 수가 없으니 피검사를 하자고 했다. 결과는 며칠 후에 전화로 알려줄 것이라고 하면서. 초음파 검사에 피 한 통 뽑았을 뿐이었는데 병원비가 이십만 원 정도 나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늦게 왔을 텐데 싶었다.


기분 탓인지 병원에 다녀온 이후에는 컨디션이 좋았다. 오랜만에 요가 교실에 갔다. 그날은 왠지 시장 구경을 하고 싶었다. 쾌적하고 조용한 건물을 통과하는 길이 아닌 소란스럽고 활기찬 몽콕 시장 쪽으로 갔다. 수산시장의 상인이 바닥에 물을 쏟아붓고 있을 때 전화가 울렸다.


“Hello?”

“Hey! Cong…”

“Excuse me?”

“Congl…”

“Sorry, I can't hear you. Just a moment please.”


물 붓는 소리, 흥정하는 소리,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

시끄러워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겨우 조용한 구석을 찾아서 한쪽 귀를 막고 다시 들었다.


“Conglatulations! Yes, you are pregnant!”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왔구나. 드디어 내게 와 주었구나.


전화를 한 직원은 산전검사 등을 이유로 며칠 후에 한 번 더 오라고 했다. 날짜와 시간을 정하고 전화를 끊었다. 홍콩의 남대문 시장 같은, 그 소란스러운 곳에 서 있었는데 갑자기 주변의 소음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 멍하니 있었다. 웃음이 났다. 드라마에서는 이렇지 않았는데. 여주인공은 뭔가 조용한 곳에서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거나 아니면 따뜻한 병원에서 ‘축하드립니다. 임신 5주 차예요.’ 이런 말을 들으며 가슴 뭉클해했는데. 낯선 외국의 시끄러운 시장 한복판에서 영어로 이 소식을 들을 줄이야. 이건 내가 상상하던 장면이 아니었다. 인생은 그런 것이겠지.




그때가 두 번째 결혼기념일을 코앞에 앞둔 어느 날이었다. 남편은 결혼기념일을 위해 코타키나발루 여행을 계획했었다. 의사에게 코타키나발루에 가려고 한다며 비행기를 타도될지 물어보았다. 의사는 비행기가 문제가 아니라 코타키나발루가 문제라고 했다. 지카 바이러스(Zika virus)가 발생한 곳이므로 주치의로서 이 여행을 만류한다고 했다. 출국 이틀 전에.

홍콩은 동남아 항공교통의 허브 같은 곳이었다.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비행에 나설 수 있었고 비행시간도 인천 출발에 비하면 짧은 편이었다. 유럽 항공교통의 허브인 파리에 살 때처럼, 나는 버스를 타듯 비행기를 타고 다니려는 계획을 잔뜩 세워두었었다. 저가 항공의 문제는 취소 시 환불받기가 어렵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코타키나발루 일정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 결정했었다. 비행기도 호텔도 모두 취소 불가. 그런데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기별 천사가 찾아왔고, 여행 가려던 곳에는 지카 바이러스에 감염된 환자가 두 명 있다고 했다.


가지 말까, 갈까, 가지 말까.


이틀 동안 마음이 수백 번도 바뀌었었다. 임신 초기였기 때문에 친정엄마에게만 살짝 귀띔해준 상황이었다. 엄마는 코타키나발루행을 결사반대했었다. 쿨하게 취소하자고 했다가, 이제 둘이서 여행 갈 일이 또 있겠냐고 했다가, 그깟 돈이 중요하냐 아기가 중요하지 했다가. 결국, 우리는 천연 모기퇴치제와 유아용 모기 팔찌를 사 들고 코타키나발루로 갔다. 반딧불 투어도 못 가고 수영장에도 못 들어간 채 - 비수기에 나선 여행이었기에 남편은 혼자서 그 넓은 수영장에서 돌고래처럼 놀았다 - 긴 옷으로 몸을 가리고 사람도 모기도 없는 햇볕 아래에 앉아있었다. 그래도 누군가가 해주는 밥을 먹고 햇살 받으며 책을 읽으니 좋았다. 코타키나발루의 석양은 참 아름다웠다. 무사히 잘 다녀왔었다.





출산은 한국에서 하기로 했었다. 출산 즈음 남편이 한국에서 다섯 달 정도 머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배우자 출산 휴가에 남은 휴가를 붙이고, 재택근무도 좀 하고, 기존에 예정되어 있었던 한국 출장 일정에도 참여하면 눈치 보지 않고도 그 정도 있는 것이 가능했다. 주치의에게 한국에서 출산할 것이라는 말을 꺼낸 날, 주치의는 다시 생각해보라고 했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이 많이 높아졌다고 생각했었는데 우리나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통하는 이야기였을까. 의사는 마치 의료가 열악한 어느 시골에 가서 출산하겠다는 것처럼 받아들이고는 엄청나게 걱정했었다. 내가 마음을 바꾸지 않자 요즘은 한국 병원도 괜찮냐며 재차 확인했었다.


괜찮냐니. 제게는 여러모로 홍콩보다 훨씬 낫습니다만.




우리의 첫 홍콩 집은 출산할 때쯤 비웠다. 집주인은 우리가 오래 살기를 바랐지만 몇 개월간 아무도 살지 않을 집에 내야 하는 월세가 너무 비쌌다. 그다음 나의 홍콩행은 아이와 함께였다. 아이는 백일 때 여권 사진을 찍고 6개월 때부터 비행기를 타기 시작했다. 뽀로로를 보여주지 않아도 비행기에서 운 적이 없었다. 고마웠다. 두 번째 홍콩 집은 홍콩섬의 어느 레지던스였다. 월세가 더 비싸서 많이 고민했었다. 하지만 우리는 서울과 홍콩을 얼마간 오가며 살 계획이었기 때문에 단기 계약이 가능한 곳이 비용 면에서도 나았다. 청소와 관리를 해주었다. 덕분에 나는 아이 돌보기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아이는 잘 웃었다. 청소와 관리를 해주는 분들께 늘 방긋 웃으며 인사했다. 공원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웃었고 지나가는 강아지를 보면서도 손을 흔들었다. 사람들은 그런 아이를 ‘happy girl’이라고 부르며 예뻐해 주었다. (2년 반 후 태어난 둘째는 반대로 엄청나게 우는 아이였다. 남편은 ‘crying boy’라고 불렀다) 육아는 서툴렀고 홍콩은 여전히 낯설었다. 그래도 나는 엄마가 되어야 했다. Happy girl이 웃어주는 덕분에 용기를 냈다. 떠돌이처럼 지냈던 당시, 홍콩에도 서울에도 아이의 장난감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는 집 밖에서 놀며 자랐다. 공원에서, 바다에서, 갤러리에서, 길거리에서. 너무 어린아이를 밖으로 데리고 다니는 것이 아닌가 싶어 걱정될 때도 많았다. 그런데 외국인들은 - 그곳에서는 내가 외국인이었지만 - 그렇게 어린아이와도 자연스럽게 매일 외출했다. 내 마음속에 걱정이 번질 때면, 일찌감치 새로운 세상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 이 아이가 나보다 더 씩씩하게 살아가기를 빌고 또 빌었다.


남편의 출장은 더욱 많아졌다. 그 출장 기간에 맞춰서 나와 아이는 한해의 반은 홍콩에서, 반은 서울에서 보냈다. 어느 날 홍콩에서 시위가 발생하며 회사는 서울에서의 재택근무를 허락해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일단 서울로 돌아왔다. 남편은 가끔 혼자 홍콩에 들어가서 몇 주간 근무하곤 했다. 시위가 잠잠해지면 다시 홍콩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코로나 사태가 시작되었다. 서울에 머무르는 기간이 길어졌다. 둘째가 태어났다. 홍콩의 회사는 이제 다시 돌아오라고 했다. 남편은 고민 끝에 서울로 이직했다.


그렇게, 3년 반 정도의 홍콩살이가 시원섭섭하게 끝났다.



신혼(新婚).

정해진 기간은 없지만 대개 결혼 후 2년에서 3년 정도까지, 또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를 신혼이라고 부른다 했다. 첫 아이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홍콩살이와 신혼생활이 함께 끝났다. 이제 결혼 생활의 다음 챕터로 넘어가는 것이다.


깨소금 솔솔 볶아가며 신혼살림을 해 보고 싶다는 철없는 생각이 자식으로서의 도리와 진지한 커리어 계획을 이겨버렸다. 그렇게 나는 남편의 손을 잡고 홍콩으로 갔다. 차곡차곡 쌓아 올리던 나의 경력과 미래 계획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비슷한 지점에 서 있던 친구와 동료들이 저 멀리 뛰어가는 모습을 보며 때로는 부러웠고 때로는 후회했다. 양가 부모님들께서 병원으로 실려 가실 때는 달려가지 못해 한없이 죄송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좌절했다. 외국인 노동자의 식솔이자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며 외롭고 막막했다.


하지만 나의 선택 덕분에 앞치마를 두른 채 깨소금 솔솔 뿌린 반찬을 차려놓고 남편이 퇴근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새댁 놀이를 해 보았다. 서로를 유일한 아군으로 아끼며 서로에게 더욱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선물로 받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여행 가이드를 하며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웃었다. 이방인으로서 새로운 눈으로 일상을 관찰하고 잠시 멈춘 후 생각해볼 수 있는 여유를 얻었다. 요가와 중국어 수업에 참여하는 호사도 누렸다. 여러 가지 삶의 모습을 배울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음 챕터로 넘어가기 전 운동화 끈을 새로 매고 숨 고르기를 하는 시간이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소중한 날들이었다.


이제 더 많아진 팀원들과 함께 다음 장을 시작한다. 언제나 그렇듯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삶이라 계획한 대로 되지도 않을 것이고 어떻게 흘러갈지도 알 수 없다. 그래도 지난 시간이 남겨준 단단한 믿음과 즐거운 추억이 있으니 어떻게든 헤쳐나갈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믿으며 나의 신혼일기는 여기쯤에서 마무리하려 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