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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를 움직이는 그녀들

부부의 데이트

by 작은별

‘오늘 뭐 먹을래?


그 시절 남편과 나는 주중엔 한 번 정도 점심 데이트를 했고 주말 중 하루는 운동화 끈을 묶은 여행자의 자세로 바깥나들이에 임했다. 점심 데이트 날이면 오늘 무엇을 먹을 것인지 결정하는 것이 그의 오전 일과 중 가장 중요한 업무였다. (사장님 그때 죄송했어요) 치열하게 고민을 하긴 했지만 90% 이상의 식사는 구룡역 ICC 건물의 지상 또는 지하, Elements 쇼핑몰의 식당가에서 해결했었다. 그곳의 식당들은 샐러드나 수프, 음식, 차를 포함한 점심 세트메뉴를 저녁 식사 때 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인 HKD 110 - HKD 180 (대략 16,000원에서 28,000원 사이) 정도에 제공했었다. 4년쯤 전의 일이니 요즘은 아마도 가격이 더 올랐을 것이다. 봉사료를 따로 받는 곳도 꽤 많이 있었다.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는 모르겠지만 부부의 점심 한 끼로는 가성비도 가심비도 참 별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장점이 있었으니, 남편이 ICC 69층에서 아래로 내려오기만 하면 된다는 점 (내려오는 데에도 엘리베이터를 갈아타야 해서 한참 걸렸다), 로컬 식당에서는 모르는 사람과의 합석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이곳에서는 테이블 한 개를 오롯이 사용할 수 있다는 점, 그릇이 날아다니지 않고 예쁘게 테이블 위에 올라오며, 아주 약간 더 친절하다는 점 등이었다. 관광객들이 좋아하는 유명한 중식당들도 있고, 태국식 레스토랑, 베트남 쌀국수 등을 파는 식당, 고급 일식당, 브런치 카페 같은 곳, 피자나 파스타를 파는 패밀리 레스토랑, 고급 수제버거 식당 등이 있어서 그날그날의 기분과 자금상태를 반영하여 함께 선정하곤 했다. 이 점심 한 끼가 뭐라고. 그래도 남편과의 점심 데이트는 외로운 타지 생활 속에서의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점심 데이트 덕분에 나는 남편의 회사 동료들을 꽤 많이 만났었다. 고맙게도 다들 즐겁게 말 걸어 주었고 나중엔 서로의 안부와 소식을 묻기도 했다.





아주 가끔 ICC 밖, 로컬 식당가로 나갈 때도 있었다. 저렴하고 맛있는 국숫집이나 딤섬집을 찾아다녔다. 2017년 당시 ICC 일대는 어마어마한 공사장이었다. 심천(선전)과 홍콩을 20분 내에 연결하는 광저우-홍콩 고속철도의 종착역인 서구룡역이 한창 공사 중이었고, 홍콩 정부가 아시아 문화의 중심이 되고자 야심 차게 추진하는 서구룡문화지구(West Kowloon Cultural District)라는, 아시아 최대의 현대 미술관 M+와 인근 시설을 조성하는 사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당연히 근처엔 아파트 공사장도 있었다. 홍콩 답게 지하 및 지상에서 역 간, 건물 간 연결도 해야 하고 각 공사의 규모도 매우 크다 보니 현장은 정말 복잡했다.


점심시간에 ICC 밖으로 나와 로컬 식당가로 가는 길은 매우 분주했다. ICC의 직장인들 뿐 아니라 공사장의 수많은 인부들의 점심시간이자 휴식시간이기도 했다. 다양한 국적의 현장 노동자들이 인근 식당에서 간단히 식사를 마친 뒤 육교나 길거리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며 쉬고 있었다. 항상 시원하고 쾌적한 ICC와 달리 문밖은 덥고 습했다. 어느 나라에서나 공사장은 위험하고 힘들지만 홍콩의 공사장은 그 규모 때문일지 날씨 때문일지 더욱 고단해 보였다. 하지만 대규모 공사장에서 느껴지는 역동적인 에너지도 분명 있었다.


Elements와도 이어진 서구룡역은 드디어 2018년부터 중국 대륙과 홍콩을 연결하였다. 가끔 구경하러 갔었는데 홍콩-중국의 인구 규모에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던 나로서는 기차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 수에 압도당하는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 이후로는 문을 닫은 적도 있다 하니 요즘은 한산할 듯하다) 미술관 이상의 미술관을 지향한다는 (more than museum) M+는 개장 훨씬 전부터도 웹사이트와 인근의 갤러리들을 이용하여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었다. 퇴사 직전에 참여했던 TF팀에서 담당한 업무 중 하나가 해외의 박물관, 미술관, 과학관 등을 방문해서 특징을 정리하고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었. 그래서 나는 서구룡문화지구 프로젝트와 M+에 관심이 많았다. 수석 큐레이터(현재 부관장)가 한국인이라는 정보에 혼자 반가워하기도 했다.


40헥타르. 약 12만 평에 그려내겠다는 서구룡문화지구 조성은 현재도 진행 중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것 같고, 최근에 M+도 문을 열었다고 한다. 변이에 변이를 거듭하는 이 바이러스가 어느 정도 진정되고 난 후 여행길이 다시 활발해진다면 이번에는 홍콩섬보다도 구룡반도 서쪽 바닷가의 서구룡 문화지구가 더 유명해질 듯싶다.



주말의 데이트 코스에서는 일터인 ICC와 그 인근은 무조건 제외하였다. 우리는 바다 건너 잘 알려지지 않은 섬을 찾아 나서거나 구룡반도 위로 더 올라가곤 했다. 홍콩섬의 트램을 타고 따라가 보기도 하고 어느 날은 인테리어 용품이 가득한 골목, 또 어떤 날은 물고기와 새를 파는 골목 등 골목 구석구석을 구경하다가 다리가 아파 주저앉기도 했다. 의외로 등산할 곳이 많다 보니 초급 난이도의 등산 코스에 도전한 적도 있다. '피크닉' 분위기를 내 보겠다며 도시락을 싸서는 도시 곳곳에 잘 마련되어 있는 공원을 하나씩 찾아다니기도 했었고. 부유한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라는 이야기에 - 부끄럽지만 그저 어떤 동네인지 궁금해서 - 디스커버리 베이와 리펄스 베이도 가끔 가보았다. 디스커버리 베이에서는 모래밭에서 놀다가 벌레에 물려 나도 남편도 엄청 고생한 이후 심술이 나서 더는 가지 않기로 했었다. 조용하고 한적한 리펄스 베이는 그 너머에 있는 스탠리까지 가서 시장이 열리는 것도 구경하고 잘 놀았는데, 교통편이 너무 불편해서 (하필 돌아오는 길에 차가 엄청 밀림) 또 심술이 났던 추억이.


매우 더운 날에는 바다로 갔다. 홍콩의 젊은이들이 많이 하는 정크 보트 파티에도 한 번쯤 참여해 보고 싶었다. 주로 미혼의 젊은 남녀들이 설렘 가득 안고 어울리는 곳에 우리는 그다지 적합한 참여자들이 아닌 듯해서 알아서 눈치껏 빠졌으나 첫째가 조금 더 늦게 찾아왔다면 내가 기획하고 지인 모집에 나설 기세였다.콩의 바다는 투명한 에메랄드 빛은 아니다. 그래도 홍콩 정부가 매일 수질 상태를 알려줘서 참고하여 물놀이에 나서곤 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해변은 란타우섬의 청샤비치(Cheung Sha Beach). 길고, 예쁘고, 사람도 적었고(!), 뒤에는 산도 있으며, 물소도 어슬렁거리며 다녔다. 남편과 워터해먹을 사 들고 가서 모래에서, 바다에서 한없이 게으른 하루를 보냈던 기억이 새록새록. 지금의 삶도 좋지만 그때도 (더…) 좋았네.



물소와 워터해먹 (그의 젊은 시절+귀요미 뒤태)



그런데 주말의 홍콩에서는 다른 도시에서는 보지 못했던 모습이 펼쳐졌다. 지하철역 곳곳에, 주요 관광지 건물 근처에, 홍콩섬의 공원마다, 건물과 건물을 잇는 육교에 엄청난 인파가 모여있었다. 사람들이 오가는 길거리나 통로에 그냥 앉아있기도 하고 상자나 우산 등으로 그들만의 요새를 만들어서 누워 있기도 했다. 음식을 나누어 먹고, 서로 머리 손질을 해 주거나 손톱을 칠해주기도 하고, 간단한 도박을 하는 팀도 있었다. 가끔은 춤을 추었다. 우리나라 아이돌 그룹의 가요를 틀어놓고 맹연습 중인 무리도 꽤 있었다. 그들은 주로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에서 건너온 여성들, 홍콩의 입주 가사도우미 ‘헬퍼(helper)’들이었다.

처음 홍콩을 방문했던 2012년 겨울. 길거리에 앉아있는 수많은 여성을 보며 나는 매우 충격받았었다. 사정은 잘 모르지만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이 추운 겨울에 (비록 홍콩의 겨울은 밖에서도 견딜 만하긴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은 왜 길거리에 나와서 있을까, 혹시나 범죄의 대상이 되면 어떡하나, 도대체 여기 정부는 뭘 하고 있나 등등 당혹스러웠다. 나중에 그들이 이렇게 길거리로 나오는 것이 본인들의 의사에 따른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고는 더 놀랐다.


사연은 이랬다. 1970년대 이후 필리핀 정부는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자국민의 해외 진출을 적극적으로 장려했고, 비슷한 시기 홍콩은 경제가 성장하며 (소득 증가 + 여성의 경제참여 증가) 필리핀 가사노동자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인도네시아나 네팔 등 다른 나라에서도 헬퍼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홍콩 정부는 외국인 가사노동자와 관련된 사항을 법과 규정으로 정해서 매년 발표했다. 헬퍼를 고용하는 사람은 헬퍼에게 의료보험, 생활공간 등을 반드시 제공해야 하고 주 1일의 휴일과 법정 최저시급 이상의 급여를 (2021년 기준 월 HKD 4,630, 70만 원 정도) 보장해야 한다. 헬퍼는 반드시 한 고용주 가정에 입주 가정부 형태로, 계약된 범위 내에서만 일한다고 했다. (물론 법을 어기는 사례는 양측 모두에서 발생한다) 고용주와 6일 동안 한 집에서 머물다가 주 1회 24시간의 휴일이 보장되는 날. 일터를 벗어나기를 원하는 헬퍼들과 가족과 오붓한 시간을 원하는 고용주들의 희망 사항이 만나 홍콩의 헬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다.


계약서상 쌍방이 동의한 경우라면 헬퍼의 업무 내용에 제한은 없는 것 같았다. 흔하진 않지만 운전이나 경호를 담당하는 남성 헬퍼도 있다고 했다. 대부분은 육아와 집안일을 하고, 환자가 있는 가정의 경우 간병, 노인이 있는 경우 돌봄을 제공한다. 홍콩의 많은 가정에서는 헬퍼를 고용한다. 고용주들 간에는 헬퍼에 관한 대화가, 헬퍼들 간에는 고용주에 관한 대화가 마치 영국인들의 날씨나 왕실 이야기처럼 가볍고 흔한 주제인 것 같았다.

홍콩에서 만난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헬퍼 덕분에 워킹맘이 살기에 한국보다 홍콩이 낫다고 했다. 워킹맘이 아니더라도 한국보다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도우미를 구할 수 있으니 좋다는 이야기도 많았다. 당시에 남편과 나는 시아버지의 잦은 입·퇴원과 통원치료로 힘들어하시는 어머님을 위해 간병인을 구하는 일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기 때문에 헬퍼 제도가 우리나라에 있다면 도움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었다.

아마도 내가 더 오래 홍콩에 머물렀다면 우리 집에도 헬퍼가 있었을 것이다. 가족도 친구도 없는 타지 생활에서 잠깐이라도 아이를 봐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큰 힘이 되니까. 하지만 홍콩 살이 동안 관찰해본 헬퍼 고용은 참 복잡해 보였다. 일단 홍콩의 집은 면적이 좁아서 (큰 집에서 살 수 있다면 다른 이야기이지만) 가족이 아닌 다른 외국인과 같이 살아가는 것 자체가, 남편과 나는 성향상 썩 내키지 않았다. 헬퍼에게 의료보험뿐 아니라 식비 (함께 식사하지 않을 경우), 휴대폰 및 사용 요금, 2년 계약 기간 후 고국 왕복 비행기 표와 휴가 등을 제공하는 고용주가 되는 길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무엇보다 사람과 사람 간의 일이라 좋은 헬퍼를 만난다면 서로의 외국살이에 더할 나위 없이 큰 힘이 되겠지만 여러 가지 사례를 관찰하고 전해 들으며, 나의 경우는, 없이 사는 편이 훨씬 속 편하겠다 싶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헬퍼도 많고 헬퍼 앞에만 서면 얼굴이 달라지는 고용주들도 많았다. 주말 나들이마다 거리를 가득 메운 헬퍼를 보며 홍콩의 자본주의, 인간은 평등한가, 한 사회가 합의하는 기준의 설정 등에 관한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학교가 끝난 후 아이는 헬퍼에게 가방을 던졌다. 놀이터에서 만난 헬퍼는 자신을 놀리며 계속 뛰어다니는 다섯 살짜리 꼬마를 쫓아다니느라 지쳐 있었지만, 고용주가 보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 뛰었다. 과연 이 아이들은 '평등한 인간'이라는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싶었다. (물론 아이가 이렇게 행동하지 않도록 교육하는 부모가 훨씬 많을 것이다) 누가 헬퍼 얼굴에 물을 부어버렸다더라, 헬퍼가 음식에 이상한 것을 계속 넣었다더라, 하는 이야기도 가끔 들었다. 헬퍼가 거액의 빚을 지고 사라져서 곤란을 겪고 있는 고용주들의 이야기와 한국에 잠시 데려갔더니 사라져 버린 헬퍼 이야기도 잊을만하면 등장했다.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수많은 기회가 반짝이지만 자본주의가 낳은 여러 극단이 존재하는 곳. 인간이 평등하지 않다는 현실을 눈앞에서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곳. 내게 홍콩은 그런 곳이기도 했다.




나의 심란한 마음과는 별개로 홍콩에서 헬퍼는 참 중요한 존재이고 홍콩에서 일할 기회는 많은 헬퍼들에게 매우 소중한 것이었다. 자신의 아이는 고국에 두고 타국에서 남의 아이를 위해 요리를 하고, 아이와 놀아주고, 집안일을 하지만 그 대가로 얻는 소득은 고국에서와 비교하면 너무나 큰 액수이기 때문에 이 일자리는 인기도 많고 경쟁률도 높다고 했다. 영화 ‘국제시장’에서처럼 우리나라도 예전에 독일에 광부로, 간호사로, 베트남 전쟁에 군인으로 사람들을 내보냈었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나간 그들은 외화를 벌어 국익에 기여하고 기다리는 가족들을 먹여 살렸으니. 업무 분야가 다를 뿐 해외 진출의 이유도 결과도 매우 비슷한 것인가.

한편 남편과 나는 그녀들이 진정 이 향기로운 항구를 움직이는 실세들이라고 말하곤 했다. 헬퍼가 없으면 많은 홍콩인의 일상에 큰 차질이 생길 것이고 그들의 일터 또한 상당히 영향을 받을 것이니까. 종종 들러서 보곤 했던 KOTRA의 블로그에서는 2019년 기준으로 홍콩에 거주하는 외국인 헬퍼수가 약 39만 명 (홍콩 전체 인구는 약 720만 명)이고 지역경제 기여도는 GDP의 3.6% 정도라고 했다. 저 기여도는 가정 내에서 노동의 가치만 따진 것이었으니 그녀들의 실질 영향력은 아마도 더 클 것이다.


홍콩 시위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는 헬퍼들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홍콩으로 들어가려던 헬퍼는 입국이 지연되어 발을 동동 굴렀고, 고국에 다녀올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헬퍼는 하늘길이 막혀 좌절했다고 했다. 홍콩에서의 일상을 보내던 헬퍼들 입장에서는 그녀들의 즐거움이었던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않게 되어, 그들도 고용주들도 서로 힘든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그래도 시위가 일어나는 지역을 피해서 여전히 길거리 모임을 한 헬퍼들도 있었다고. 코로나 시국에는 헬퍼의 바깥출입 때문에 속앓이하는 고용주들도 꽤 있는 것 같았다.

가족인 듯 가족 아닌 그들. 나는 제삼자로서 한 발 떨어져 관찰했기 때문에 사실 ‘헬퍼 제도’를 제대로 알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 거리가 내게 더 많은 질문을 던져주었고,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라는 고민을 잊지 않도록 해 준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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