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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취향은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by 작은별

VIP 여행사 놀이는 철저히 고객 맞춤형이었다. 나는 고객 만족도에 일희일비하는 성실한 가이드였고. 하지만 나의 취향에 맞게 고객의 일정을 조작해서 사리사욕을 채운 적도 있었으니, 여행하기 좋은 9월에 딱 나타나 준 고등학교 때의 단짝 덕분이었다.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역시 내 친구. 지금 생각해도 고맙다.


우리는 IFC 앞의 페리 터미널에서 아침 일찍 배를 타고 청차우(Cheung Chau)라는 작은 섬으로 향했다. 만선을 기원하는 빵 축제가 열리는 봄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붐비지 않는 곳이지만, 그래서 더욱 좋은 한적한 해변과 오래된 사원이 있었다. 부적이 주렁주렁 달린 나무를 보고 신기해하다가 바닷가에서 어린아이들처럼 모래 놀이를 하고 물에 발을 담그기도 하고. 참, 옛날 옛적 해적들의 이야기가 남아있다는 바위에도 가보았다. 저렴하고 맛있는 어느 해산물 식당에서 가리비찜과 꽃게 요리를 먹었다. 식당 옆에 있는 잡화점에서 작은 기념품도 샀다. 다시 홍콩섬으로 돌아와서는 구룡반도에 있는 홍콩 역사박물관으로 향했다.

홍콩 역사박물관과 과학박물관은 침사추이 번화가에서 가까운 곳에 마치 쌍둥이 건물처럼 마주 보고 서 있는, 홍콩의 어린이들에게 인기 만점인 장소였다. 홍콩 역사박물관의 ‘홍콩 이야기’라는 상설전시실은 홍콩의 역사와 특징을 알고 싶은 어른들이나 관광객들에게도 매우 유용한 곳이었다. 나는 가끔 방문해서 무료 도슨트 투어를 따라다니곤 했다. 홍콩의 지질 특성부터 시간의 순서에 따라 홍콩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렇게 땅이 귀하다는 홍콩에서) 너른 공간에 큼직큼직하게 실물 크기의 모형을 보여주고 여러 체험을 유도하는 전시를 제공했다. 지루하지 않게, 오히려 자꾸만 사진을 찍고 싶게 하는 매력적인 곳.


홍콩 역사박물관이 보여주는 모습이 홍콩의 전부일 수는 없지만, 홍콩에 원래 살았다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나 영국 식민지 시기에 대한 설명 방식, 홍콩 반환 이후 최근에도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는 일국양제(一國兩制)에 관한 이야기까지 나는 이곳에서 홍콩을 이해하고 누군가에게 설명하는 데 도움을 받았다. 2017년은 마침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지 20년째가 되는 해였다. 홍콩의 정치적 상황, 현재와 미래에 대한 기대 또는 우려가 뜨겁게 논의되던 시점이었다. 당시 나는 광화문의 촛불을 경험하고 홍콩의 혼란 속으로 들어간 터라 뭔가 역사 속 한 장면에 머물러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전시실 입구의 안내판을 읽어보면, ‘홍콩 이야기’ 전시는 6년간 기획하고 준비한 후 2001년에 문을 열었다고 했다. 소요된 비용은 HKD 190m 정도이니 원화로는 280억 원 정도, 전시면적은 7,000㎡다. 이 비용이 모두 전시를 위해서 사용되었는지, 전시와 건축 일부에 사용되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비용은 둘째치고 6년간의 준비 기간은 인상적이었다. 박물관 전체도 아니고 한 개의 상설 전시에 이러한 시간과 자금을 투입해서 준비했다니. 이 글을 작성하며 검색해보니 홍콩 이야기 전시는 2020년 하반기 이후 보수공사(renovation) 중이라고 한다.

여담이지만, 개인적으로 경험한 최고의 박물관은 샌프란시스코 과학관 Exploratorium이었다. 박물관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 - 박물관은 어린이들이나 가는 곳이다, 지루하다, 어디나 비슷하다 등등 - 을 송두리째 바꿔준 곳이었다. 모든 연령대가 즐길 수 있는 체험형 과학관으로, 특히 어른들을 위해서 목요일 저녁에는 18세 이하의 출입을 제한한 후 박물관 바(Bar)를 개장한다. 클럽 같은 분위기 속에서 뇌를 섹시하게 만들어주는 재미있는 과학 특강이 곳곳에서 열린다. 처음 Exploratorium을 경험했을 때 얼마나 충격적이었던지. 지적으로 자극받고, 신나고, 술도 맛있고. 박물관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즐거웠다. 업무차 출장으로 3일 연속 방문했었는데 글 쓰다 보니 뒤늦은 애사심이 든다. 돌이켜보니 좋은 직장에 다녔는데 왜 그때는 몰랐을까.


함께 출장 갔던 선배와 마주치는 방문객들에게 ‘Why are you here - MUSEUM - tonight?’이라고 물어보곤 했다. 대답은 더 황당하게도 ‘It’s fun!’ ‘We like SCIENCE.’ 그때 선배랑 워싱턴 D.C. 의 스미스소니언(Smithsonian)이나 뉴지움(Newseum)보다도 여기가 훨씬 더 재밌다며, 우리나라에도 이런 공간을 만들어보자고 열정 가득한 우리만의 계획을 세웠었다. 돌아와서 보니 우리나라는 박물관에서 주류를 판매할 수 없었고 (이건 매우 사소한 일이었지만) 기타 등등 복잡한 어려움이 많았다. 결국, 나는 퇴사 후 마포에서 애 둘 키우는 아줌마가 되었고 팀장이 되었던 선배는 학교로 갔다.


https://www.exploratorium.edu/


친구와는 난리안 공원(Nan Lian Garden)을 산책하고 공원 옆에 있는 치린 사원(Chi Lin Nunnery)에도 갔다. 도심 속에 당나라 양식으로 된 고즈넉하고 조용한 공원이 있어 그동안 밀린 수다를 떨며 산책하기에 참 좋았다. 사원이긴 하지만 우리나라 사찰과는 다른 점이 많아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관찰했다. 치린 사원은 비구니 사찰인데 괜찮은 가격의 채식 식당도 운영하고 있어서 예약하고 식사도 했었다. 그날 저녁에는 남편도 합류해서 함께 맥주잔을 기울였다. 하필 셋 다 같은 고등학교를 나오는 바람에 옛날 옛적 이야기를 꺼내 웃다가 울다가 했다. 함께 공유하는 추억이 있다는 점에 새삼 감사하면서.




네 번째 날에는 나의 고객들 대부분이 한국으로 돌아가거나 마카오로 향하는 배를 탔다. 나는 마카오로 함께 떠날 때도 있었고 떠나는 배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 때도 있었다. 그들이 일상으로 돌아갈 때, 나는 가이드 놀이가 드디어 끝난 후련함, 뿌듯함과 함께 서운함을 느꼈다. 만남은 반갑지만 이별은 깊이 아쉬웠다. 그 이전의 삶에서 주로 떠나는 이의 입장이었던 나는, 떠나는 나의 뒷모습을 지켜봐 주었던 사람들을 뒤늦게 떠올리며 가슴이 먹먹해지곤 했었다.


공항에서나 페리 터미널에서 다음 만남을 기약한 후 이별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나의 발걸음은 헛헛했다.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누군가를 보내고 다시 나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때마다 나는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한층 더 성장하고 있다며 스스로를 다독이곤 했다. 함께 보낸 시간이 남겨준 사진을 돌려보았다. 다시 일상으로 들어가기 위해 요가 스튜디오로 향하고 시장에 들렀다. 함께 가본 식당이나 여행지 중 좋았던 곳으로 남편을 데리고 가면서, 그곳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이야기하며, 그렇게 여행과 일상의 경계를 오가는 시간을 보냈다.




⁕ 덧붙이는 이야기 ⁕

1. 홍콩 이야기 전시실에는 영국인 총독들의 사진이 재임 순서대로 걸려 있었다.

처음 이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당황했다. ‘식민지 총독’에 관한 내 느낌과 홍콩인들의 감정이 매우 다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영국인들의 식민지배 방식이 일본인들의 방식보다 다소 온건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기 또한 홍콩인들에게는 쉽지 않은 나날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물론 영국이 지배하는 홍콩은 새로운 변화의 중심이었다. 그러한 변화는 쑨원 등 일부 지식인들이 혁명을 꿈꾸고 준비하도록 자극하기도 했다. 영국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홍콩에 소개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사실은 조금 더 복잡하므로 ‘보이기도 했다’라고 썼다) 현재도 영국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을 가진 홍콩인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이 염원하는 항인치항(港人治港·홍콩은 홍콩 사람이 다스린다)은 지금뿐 아니라 그때도 요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콩 이야기의 전시실에서 만나는 영국 식민지배 시기의 모습은 꽤 괜찮다. 반면, 짧은 기간이었으나 일본‘점령’기는 비참하게 묘사되어 있다.

전시실의 영국인 총독 사진을 보며 나는 두 가지 생각을 했었다.
첫째, 역사는 역시나 승자의 편에서 서술한 이야기이다.
둘째, 박물관은 교육적 역할을 한다. 이 전시를 기획한 사람들은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2020년 하반기부터 시작되었다는 보수공사 이후 재단장한 홍콩 이야기는 어떤 모습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2. 홍콩회귀조국(香港回歸祖國) 20주년

2017년 7월 1일 밤에는 홍콩의 중국 반환 20주년을 기념하는 불꽃축제가 열렸다. 남편과 나는 남편의 사무실이 있는 ICC의 고층에서 불꽃놀이를 구경했었다. 불꽃 옆에는 ‘홍콩회귀조국 20주년’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반환이라는 단어의 주체는 영국이고 회귀의 주체는 홍콩이어서인지 중국에서는 회귀라고 설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해의 행사에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참석했었다. 그의 취임 후 첫 홍콩 방문이었다. 반발하는 홍콩인들도 있었고 환영하는 중국 본토인들도 있었다. 나는 관찰자였다.

그런데 그의 방문을 앞두고 홍콩 시내에는 ‘홍콩기’가 사라졌었다. 내가 자주 가던 소소한 쇼핑몰 앞에 있던 홍콩기조차도.

글쎄, 거리의 그 모습만으로도 뭔가 서늘했다.

3. 지금, 이곳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그때의 홍콩인들은 영국인들과의 차별을 겪으며 살아야 했고, 지금의 홍콩인들은 같은 중국인들과 지난한 갈등을 겪고 있다. 어떤 삶이 더 좋다고 선택하기에는 문제도 모호하고 답도 없어 보인다.

그럴 때 일상 속의 평범한 사람들은 당장 먹고, 입고, 자는 문제에 더 몰두하기도 한다.

구름까지 닿아버린 집값은 둘째 치더라도, 홍콩의 젊은이들이 대륙의 젊은이들에 비해 채용시장에서도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그들의 갈등은 어쩌면 더욱 깊어질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이 홍콩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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