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기루 May 15. 2023

서른은 팩스 넣는 법을 몰라요

꼴찌가 되는 법




웅장하고 화려한 사과나무는

미래를 위해 오늘의 가지치기를 허락해야 한다.


생각 없이 뒤틀린 방향의 가지들 때문에

빛을 받지 못한 아랫가지들은

자태를 뽐내지 못하고


또 위로 쭉 뻗어버린 가지는

 하늘만 보며 아래의 모든 것들에 교만하기에


탄생할 열매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선

변화가 필요하고

모질게도 다시 시작하는 길을 만들어야 하며


정점의 모습을 그리워말고

투박해진 자신의 모습을 인정해야

우리는 한 걸음 더 성장할 수 있다.






물리치료사로 지냈던 시절.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아주아주 성실한 우등생을 맡았다.

쥐꼬리만 한 월급의 절반은

적금+청약+펀드로 꼬박꼬박 돈도 잘 모으고

허영을 달고 사는 하루살이들에게

혀를 차는 쪽이었으며

편안한 것들에 익숙해진 제법 짬 찬 직장인이었다.


직장을 다니면서 배운 건

여초회사에서의 사회생활. (처음엔 많이 힘들었다)

수술 전, 후 재활의 영역( [TKR, THR] 환자 수술 후 체중지지 및 보행시키기, 하체에 힘이 없는 환자들에게 스텐딩 테이블을 이용한 체중 지지 및 관절가동범위 늘리기, 소아마비, 뇌성마비, 척수손상, 편마비 등 신경계 환자들 재활 프로그램, 근골격계 질환 환자 재활, 핫팩 싸기, 냉치료, 단축된 근육 이완, 통증치료기 사용방법, 치료기 장비 관리 등) 남들보다 조금 더 아는 물리치료 전문적 지식.

진상환자들 대처하는 방법, 의사소통의 중요성, 실습생들 담당업무.


그리고

기획실 관계자가 물리치료실 안내판에 붙이고 간

 '우리는 감정노동자입니다.'

이 포스터를 보는 순간,

무조건 병원은 환자가 '갑'이라는

마인드를 지녀야 할 것!



지금 생각해 보면 고작 이것 가지고

잘 살았다 자부하던 모습이 부끄러워

어디 말도 안 꺼낸다.



더 부끄러운 건 다른 세상에선

당연히 꼴찌가 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나 그래도 전 직장에서는 대접받은 애였는데..'

라는 말을 나도 모르게 곱씹고 있다니





친구가 찍어준 주소에 간판은 온 데 간 데 없고

문 쪽에 파란색 플랜카드가 붙여져 있다.

'ㅇㅇ푸드'


출근시간은 9시,

좀 더 일찍 나와서 위치를 확인하고

다음날 집에서 나설 시간을 대략 계산한다.

그리고 잠겨진 도어록을 보고선

친구에게 전화를 한다.



"친구야 혹시., "


"앞에 비밀번호 몰라서 전화했지? *****이야."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분식집에서나 쓰는 부피 큰 청*원 고추장이

시선을 강탈한 게 첫 번째.

그 밖의 빵가루, 올리브유, 아카시아꿀, 청결볶음참깨, 황설탕, 감자전분..등

평소에 찾아서 사는 식품들이 아니라

낯설면서도 낯익은 식품들이

무질서하게 어질러져있다.



비밀번호 소리가 들린다. 친구였다.



"왔어? 사무실로 가자 들어와!"


 앞장서는 친구를 따라갔다.

문에서부터 한 다섯 걸음 진보 후

오른쪽으로 꺾으니 미닫이문이 나왔다.

그 문 앞에선 케로로가 그려진 김 세트가

나를 맞이한다.

 

케로로 덕에 미소를 머금고 사무실에 들어선다.


여기서 일을 어떻게 해? 정도는 아니지만

어디에 앉아야 하고 어디에 서 있어야 할 지

 도무지 가늠이 안 가는 구조다.

컴퓨터 세 대와 책장 하나,

책상 하나, 소파 하나가 전부였고

그 밖엔 바닥에 어질러진 선과 하나뿐인 전화기(?),

 팩스, 포스트잇과 펜, 클립,

책상 위엔 업체들의 사업자등록증,

음식사진과 4월 발주서라고 적혀있는

종이들이 책장 대부분을 차지했다.


얼마 되지 않은 기업이라

열정으로라도 더울 것 같던 사무실이

차가운 온도로 둔갑하여 쌩하다.



(장난 반 진심 반으로)

"여름에 에어컨 필요 없을 것 같은데?"


"미안,, 너무 춥지."



차차 상황파악 하려고 하는 나,

아홉 시가 되자마자 다른 기업에서 온 전화에 허둥대는 친구.


"나 뭐부터 하면 좋을까?"


(전화기를 귀에 걸치며) "우선 업체들에게 들어온 발주서를 엑셀에 입력 좀 해줘!"


'발주??? 서가 뭐지? 설명 없이 말 하는 걸 보면 옵션으로 알아야 되는 건데?'


켜져 있던 엑셀파일을 살펴본다.


'ㅇㅇ푸드 '황ㅇ주의과채습관퍼플 140ml*24, 4월 6일 수량 15, ㅇㅇ고, (주)ㅇㅇ유통'


고작 여기서 아는 건 푸드라는 단어,

과채습관은 병원 다닐 때 시켜 먹어봐서 주스라는 걸 안다.

그리고 날짜와 고등학교, 수량, (주)가 주식회사라는 것 정도?


계속 들어오는 팩스의 소음에 집중도 안 된다.

고개를 끄덕이며 업무 파악하는 척을 하고 있다.



전화를 끊은 친구는

내가 해야 할 업무에 대해 알려주러 온다.


'일단 우리는 제조사들에게 물건을 떼어와서

다른 업체에 간접적으로 납품하는 거야.

이 업체들이 우리에게 보낸 발주서의 상품을 찾아서

제조사에 발주를 하면 돼.'



'????? 도대체 발주서를 받고 또

발주서를 보낸다는 게 뭐야.

제조사랑 업체는 왜 다르고?'



친구가 말하는 걸 하나도 빠짐없이

수첩에 능기적 적어나갔으나,


아, 단어들부터 1도 모르겠다.


병원에서 쓰던 pt104, pt101, pt105

(물리치료에서 선생님들끼리 쓰던 치료용어)

찰 하면 떡!으로 알아들었던

그때의 수신호가 그리워진다.

집에서 나왔을 때 기운찼던 자신감이

수직낙하 중이다.


'선뜻 이 일을 한다고 대답한 건 아닐까?

아예 모르는 분야를 배우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무턱대고 맨땅에 헤딩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지인과 일적으로 얽히는 관계를

무척 배척하는 아이지만

그걸 가만하고도 어떻게든 기업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중한 사람이 되고 싶기에

선뜻 일을 하겠다고 하긴 했다.


근데 단 하나도 모르는 상황에

무책임한 답변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 무지함으로 기업에 해가 될까 두려웠다.




친구는 무분별하게 널부러진 종이 사이로

자신의 사업자등록증을 찾아낸다.



"우리 사업자 등록증 ㅇㅇ유통에 팩스 보내달래!"



"아 어!"


한 번도 팩스를 보내본 적이 없는데 얼떨 결에

선창 후물음을 시전 했다.



상당히 멋쩍었는데 괜히 쿨한 척하며

 "나 근데 팩스 넣는 법 몰라. 어떻게 해야 돼?"



"ㅋㅋㅋㅋ나도 몰랐는데 이렇게 하면 돼."



처음이라 당연히 모를 수 있는데 부끄럽다.

다른 세상에서 꼴찌인 것을 인정 못하는 듯하다.

나 자신을 인정한다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운 건지.

배워야 한다. 부끄러워도 배워야 하고

실수를 하더라도 자존심 다 놓고 배워야 한다.


그래야 성장한다.

높은 나뭇가지의 싹을 자르고

  다시 성장하려는 마음을 투박하게 지녀야 한다.


세상은 광활하고

모르는 게 투성이고

배워야 할 것들이 아직도 너무 많은데

영원히 한 분야에 머무르지 않을 생각으로

퇴사를 했다면 맨땅에 헤딩도 해봐야 하고

자존심 다 버려가면서  

하루하루 마음도 졸여봐야 하는 걸 안다.


근데.. 알면서도 편하게 일했던

예전 내 멋짐폭발한 모습이 생각이 난다.

그리고 잠시나마 그런 나를 그리워했다.



'새로운 병원에 들어가도 금방 적응을 할 수 있는데

지금 사서 고생하는 걸까?' 하는

간사한 상상이 들 줄은 몰랐다.



생각해 보면 제주도에서

스텝생활을 할 때도 그랬다.

사람 대하는 게 제일 쉬울 줄 알았으나

여행자들의 결을 잘 알기에

공과 사를 어떻게 분리해야 할지

허둥댔던 기억이 난다.


그때도 느꼈던 감정은

'나 참 다른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허접이었네.'





전에 미생이라는 드라마를 본 적 있다.

팩스 넣는 방법도 몰라 허둥대는 장그레의 모습이

지금의 내 모습과 얼마나 닮았던 지.


당시엔 공감 못 했던 장그레에게 미안해진다.





작가의 이전글 어쩌면 난 전생에 이구아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