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기루 May 26. 2023

세금계산서는 또 어떻게 발행합니까



정답을 알고 문제를 푸는 시대다.

오버플로우 시대에 우린 저항이 없다.

감히 생각하려고 들지 않는다.

창조와 창의보단 여전한 것들로 대체하려고만 한다.


나 역시도 시키는 일만 곧 잘하던 애, 다른 일에 도전한다고 큰소리 뻥뻥 쳐놓고

개척의 의지와 문제의 해결 능력보단 짜여진 그 어떤 것에 안도하는 경향이 있는 모순적인 애.










정확히 우리가 하는 업무는 학교에 입찰을 넣어 낙찰이 되면 직접 공산품을 조달, 공급해 주고

거래처들마다 필요로 하는 식품들을

우리 기업에게 발주를 넣으면

납품해 주는 일을 한다.



이게 무슨 스타트업인데?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기존에 있던 일을

하나의 업체로 꾸리는 것이니까.

(주)가 붙은 머시기들 기업과 별반 다를 것 없이

똑같이 사는 거니까.


하지만 나와 친구는 달랐다.

이 보수적인 기업, 체계 안 잡힌 기업에서

우리의 창의력으로 어떻게든 온라인 쪽과 접목을 시키는 대단한 작업을 해보자는

거룩한 다짐과 함께 나는 일에 뛰어들었다.

하루를 그냥 사는 사람들과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 쪽에 서 있는 열정맨 친구와는

무슨 일이든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작은 거창하나 끝은 아무도 모를 제안을 해 온 건 꽤나 흥미로웠다.

이 친구와 함께 한다면 이상을 추구해도

깨고 싶지 않은 꿈을 꾸는 기분이 들 것만 같았다.

친구와 같이 기업을 키우면서

먼 훗날에 아이템을 제조해

팔아볼 수 있는 그런 생산자가 되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스친다.

생산자가 되어보려면

기업이 돌아가는 체계를 알아야 하고

 팔아야 하는 방법을 직관하는 게

제일 옳다고 생각했다.


'뭐 생각해 보면 나이트형제나 월트 디즈니가

처음부터 각광을 받았던가?

나도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근자감을 내비쳐도 본다.



중소기업, 스타트업이

돌아가는 체계는 또 다른 세상이었다.

얼추 생각했던 모습과

똑 맞아떨어지면서도 낯선 일이다.


학생시절 급식,

특별한 간식(ex) 어린이날, 스승의 날, 단오 등)을

먹으면서 '맛있네 맛없네'만 외쳤던 말 뒤에

100여 개가 넘는 기업들이 수화기 너머로


아이스크림이 녹아서 왔다는 학교 측 선생님,

어묵이 오지 않았다는 거래처,

스승의 날, 어린이날 작은 케이크 하나하나에

자체 제작 라벨 스티커를 일일이 붙이는 작업,

떡볶이 세트의 그램수와 가격이 얼토당토않다며

잘못하지 않은 누군가도 싫은 소리를 듣고

돈가스 소스와

츄러스 계피설탕이 함께 가지 않았을 때

1kg짜리 하나를 챙겨 다시 가야 하는 수고로움.


서로의 건승을 바라면서 하하 호호 웃다가

손익을 따질 땐 이기적인 칼을 내밀고

잘잘못을 떠넘기며 모르쇠 해버리는 거래처들.



나는 일단 간접납품의 발주담당과

어느 정도의 짧은 지식으로 회계를 담당하기로 했다.

뭐 직원이라고 해봤자 나랑 친구,

그리고 친구 어머님이 있다.


좁은 사무실에서 우린 일단

거창한 일 중에 제일

급한 일부터 해치우기로 한다.


꿈나무들을 위해

영양분 좋은 음식들로 추린 상품들을

조달해 주는 시스템은 꽤나 매력적이지만,


또 다른 세계의 일을 떠안는 중압감은 씁쓸했다.

특별한 재능이 없는 이상

서른 인 나는 열심히 살아야 했으므로,




친구는 매일 "오늘도 기운찬 하루!" 하며

들어오는데

난 속으로 '응 오늘도 분주한 하루!'를 외친다.


출근을 하기 싫은 건 아니지만

모든 것들에게 서툰 환경에

적응이 안 되는 건 사실이다.

그래도 따뜻한 정은

충만한 이 기업에 도움이 되는 걸

우선시한 채 가볍게 출근을 한다.


원장을 보내야 하는 날짜도 정확히 모르는 우리는

거래처의 날카로운 말에

달마다 10일인 것을 알았다.

(암묵적인 약속인 것 같다.)


"청구서 메일로 보내주시고,

세금계산서 왜 발행 안 해주세요?

 원래 10일까지 해주셔야 해요.

점심이 지나도 안 보내시길래 연락드렸습니다."



"아 저희가 신설기업이라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보내드리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죄송하다는 말을 원체 안 하고 살았던 난

출근한 지 며칠이나 됐다고

이젠 '감사합니다.'보다 '죄송합니다.'가

오히려 착 달라붙는다.



"친구야, 원장 보내주고 세금계산서 발행해 달래."


"아 지금 원장 청구서는 뽑고 있는데

넌 그럼 세금 계산서를 발행 좀 해줄래?"


벙쪘다.

내가 세금 계산서를 발행할 수 있는 사람인가?

권한 있는 사람들만 발행하는 게

세금 계산서가 아닌가?


 분주한 친구 옆에서 코치코치 캐묻지도 못하겠고

 시키는 일만 하고 있던 터라 방법이 안 떠오른다.


내겐 인수인계 해줄 상사가 없다,,

오로지 인터넷, 유튜브만 있다,,


아 그래 유튜브에 쳐 봐야겠다.


'세금계산서 발행 하는 법'을 검색한다.


그러자 '초보들도 할 수 있는 세금계산서 발행 하는 법.',

'5분 만에 발행하는 세금계산서.' 등 많은

영상이 나온다.


그중에 제일 조회수가 많은

영상을 틀고 그대로 시행한다.


참 하면서도 '이게 맞는 건가..'라는 말을 곱씹으며

막중한 업무를 비교적 쉽게 하는 기분이 든다.

[조회발급]을 누르면 거래처 사업자등록증, 이메일, 대표명 등의 입력란이 있다.


"이거 사업자등록증번호랑 전화번호 다 필요한데?"


"아 저기 모아둔 거 있는데 일일이 찾아봐야 돼."


앗 혼란스럽다. 심란하다.

이 원망스러운 종이쪼가리들아.

일단 시간이 없다.

사업자등록증을 가나다 순으로 정리를 한다.


테이프를 붙여가며 ㄱㄴㄷㄹ 칸을 나누고

친구는 거래처원장들의 총액을 확인하면서

하나하나 거래처에게 팩스를 보냈고,


보내진 팩스는 내가 다시 가져와서

세금계산서를 발행하는 곳

컴퓨터(홈텍스)에 기입해야 한다.


반복작업하는 삶의 노가다 현장

+

숫자 하나라도 틀렸다간 골로 가는 현장



미ㅇ유통의 거래처원장을 보고

미ㅇ유통의 사업자등록증을 찾아서

일일이 기입하려 했으나

사업자등록증에 전화번호가

적혀 있지 않아서 또

쌓여있는 몇 백장의 종이무더기에서

 발주서를 찾아 전화번호를 알아내 전화를 한다.


시ㅇ푸드는 또 사업자등록증 자체가 없다.

그럼 보내 달라고 해야 하는데 번호도 없다.

 번호를 알려면 발주서를 뒤져야 하는데

족히 한 500장은 넘을 발주서들은 정리가 하나도 안 되어있다.


기입해야 할 정보도

 그걸 찾을 의지도 없다.



멘붕이 온다.

 쌩노동을 해야 하는 게 정녕 답인 건 알지만..


흥미를 잃어버린 손은 점차 느려진다.


'이거 밤새서 작업해도 절대 못할 것 같은데,

누가 정답을 알려줬으면 좋겠다.'



무책임한 말을 내뱉고 있는

나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정해져 있는 답만 바라던

수동적인 나의 모습도 떠오른다.



난 얼마나 더 많은 것을 배워야 하는 것일까?



작가의 이전글 서른은 팩스 넣는 법을 몰라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