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커스에 대하여
천안문과 자금성을 뒤로 하고, 모스크바행 비행기에 오르기 위해 다싱공항으로 돌아왔다. 앞서 결항을 겪은터라, 무사히 모스크바에 도착할 수 있을지 매우 우려스러웠다. 하지만 다행히 정시에 비행기는 출발했고,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해 입국심사를 마쳤다.
모스크바에 도착하자, 북경에서 고생했던 기억은 눈 녹은듯 사라졌다. 날씨도 너무 좋았을 뿐더러, 기차역을 비롯해 유럽도 아니고, 아시아도 아닌 이국적인 모스크바의 건축물들은 경탄스러울 정도로 멋스러웠다.
호텔에 도착해 여장을 풀자마자, 바로 시내로 나왔다. 북경 경유로 인해, 모스크바를 둘러볼 수 있는 시간이 하루 줄어들었기 때문에 마음이 조급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오늘은 서커스를 봐야하는 날이다. 시간을 보아하니, 저녁 7시 공연시간을 어찌저찌 맞출 수 있을 것 같다.
모스크바의 양대 서커스는 볼쇼이 서커스와 니쿨린 서커스이다. 볼쇼이 서커스는 국외에도 이름이 높은데, 아쉽게도 체류기간 동안 예정된 공연이 없었다. 다행히, 니쿨린 서커스는 도착하는 날 당일 7시 공연이 마침 있었다. 서커스 팬으로 북한·중국·미국 등을 방문했을 때도 유명하다는 서커스 공연은 빼놓지 않고 봤던 터였기에, 서커스의 본산지 러시아의 서커스는 특히 놓칠 수 없었다.
은행에서 환전을 마치고, 남아있는 1등석 표를 하나 사서 자리에 앉으니 바로 공연이 시작되었다. 모스크바 니쿨린 서커스는 곡예라기 보다는, 하나의 종합 예술 공연이었다. 서커스 프로그램 이름은 러시아 전통 인형 ‘마트료쉬카’로, 러시아 전통 설화를 주제로 한 작은 이야기들이 춤과 곡예로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20년 전 북경에서 본 중국의 서커스와, 금강산에서 본 북한의 서커스는 초인적인 연습량을 요하는 기계적 곡예의 완전판이었다. 하지만, 같은 공산 진영의 역사를 공유하는 러시아의 서커스는 음악, 춤, 곡예가 결합한 종합예술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내한 공연을 관람한 캐나다의 태양의 서커스나 미국 LA에서 관람했던 르레브 쇼에 가까웠다.
인상 깊었던 점은 출연진의 의상과 오케스트라 연주였다. 각각의 이야기 마다 바뀌는 무대 의상이 너무나 정성스럽게 지어져 있어서 의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거웠다. 오케스트라 음악 역시 웬만한 교향악단 보다 높은 수준이었다.
또 다른 특이점으로는, 동물과 함께하는 공연을 메인으로 내세웠다는 점과 마지막 공연에서의 애국주의 강조를 꼽을 수 있다. 불곰의 나라라는 별칭 답게 곰들이 등장하여 다양한 기교를 선보였고, 공연 마지막 마장마술은 전 세계를 주유하며 보았던 여타 서커스에서도 전혀 보지 못한 수준의 것이라 경탄할 수밖에 없었다. 마장마술의 말미에, 전 출연진은 ‘Mather Russia’에 대한 직접적인 애국주의를 표출하며 공연은 마무리되었다.
한국의 서커스가 어렵다는 내용의 기사가 반복해서 나온 적이 있다. 오랜 전통의 동춘서커스 또한 관람객이 없어 어렵다고 한다. 과거 한국의 서커스 역시 곡예 중심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살인적인 연습량을 이어가며 완벽한 곡예를 선보일 젊은 곡예사가 한국에서 존재하기 쉽지 않다. 올해 봄 서울 서커스 축제에서 국내 곡예사들이 보여준 계속된 실수는 눈살을 찌푸리게할 정도였다. 곡예 내용을 다소 수월하게 꾸민다하더라도, 무대 의상 및 공연의 예술성에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나라에서도 충분히 O쇼와 르레브쇼, 니쿨린 서커스가 나올 수 있다.
서커스 공연이 끝나자 어느덧 자정에 가까워졌다. 본격적인 모스크바 관광은 내일로 미루고 호텔로 귀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