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 영묘와 쇼스타코비치 10번 교향곡
새벽 같이(5시) 일어나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본격적으로 시내를 구경하고자 길을 나섰다. 10시까지 도보로 시내를 한 바퀴 돌고, 개관 시간에 맞춰 주요 박물관과 미술관을 섭렵할 계획이다. 첫 번째 방문지는 역시 크렘린과 성 바실리 성당이 위치한 붉은 광장이다.
붉은 광장은 중국의 천안문 광장과는 다르게 열려있었다. 어떠한 공안 당국의 통제나 감시도 없었다. 밤이건 새벽이건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다. 2000년부터 시작된 푸틴의 장기집권은 스탈린이나 브레즈네프의 통치기간을 넘어설 조짐이지만, 개방된 광장은 그럼에도 러시아 국민의 지지가 굳건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했다.
붉은 광장은 부활의 문, 크렘린, 카잔성당, 성 바실리 성당, 국립 역사박물관 등으로 둘러싸여 있어, 동서남북 어디를 보더라도 아름답다. 특히 성 바실리 성당은 16세기, 이반 4세의 몽골족을 물리친 기념으로 지은 건축물인데, 둥근 양파 모양과 알록달록한 건축물의 외벽은 러시아만의 독특한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러시아 성당 건축의 정수이다. 후에, 아름다움에 감탄한 이반 4세(이반 뇌제)가 건축가 두 사람의 눈을 뽑아 이보다 아름다운 건물을 지을 수 없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내려올 정도이다.
붉은 광장을 넘어 모스크바강의 다리를 건너 내려가면,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이 있고, 서쪽으로 돌아 올라오면, 러시아 최대 장서를 자랑하는 국립도서관(구 레닌 도서관)이 있다.
도심을 한 바퀴 돌자, 어느덧 여러 박물관과 미술관이 개관할 10시가 가까워온다. 다시 붉은 광장으로 돌아와 한가운데에 위치한 레닌 묘소부터 방문한다. 이른 아침이지만, 방부 처리되어 있는 레닌의 몸을 보기 위한 장사진이 이어진다. 러시아인 절반, 중국인 절반이다. 지금 러시아를 방문하는 외국인은 중국인 밖에 없는데다가, 중국 정부차원에서 공산주의와 관련된 장소를 여행하는 것(일명 홍색 관광)을 장려하는 추세라고 하니, 레닌 묘의 중국인 장사진이 이해가 간다.
특히 올해는 레닌이 사망한지(1924.1.21.) 꼭 100년이 되는 해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후계자로, 공산혁명을 세계 최초로 성공시킨 혁명가가 땅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정권의 정당성을 보장하기 위한 기제로 활용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또 한편으로는 일견 자고 있는 것 처럼 보이는, 소련 창건자의 생생한 육신을 이렇게 보니 신기하기도 하였다.
레닌 묘소 뒤편으로는 스탈린,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 체르넨코 등 소련의 서기장과 보로실로프, 푸룬제, 부존늬 등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군부의 주요 인사들의 묘소가 줄지어 있다. 북한으로 따지면, 혁명열사릉이다. 안타깝게도 스탈린 격하운동을 이끈 흐루쇼프나, 망국의 서기장 고르바쵸프의 묘소는 보이지 않는다.
소련이 자취를 감춘지도 어느덧 30여년이 흘렀지만, 러시아 곳곳에서 레닌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많이 거리의 이름을 바꾸고, 동상을 내렸다고는 하나, 원체 그 수가 얼마나 많았던지 여전히 레닌의 얼굴을 한 부조와 그림, 그리고 이름을 지하철, 학교, 각종 관공서, 거리 등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레닌 묘소도 그의 여전한 위상을 확인해주는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매년 5월 대조국전쟁 승전일 열병식에서 레닌묘는 러시아 수뇌부의 주석단 내지, 주빈석으로 활용되고 있다.
레닌 묘소를 둘러본 후 바로 옆에 있는 역사박물관을 찾았다. 러시아 고대 유적부터, 20세기 초 로마노프 왕조 멸망까지 러시아 보물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금으로 도배된 황실의 보물들이 인상 깊었다. 인구의 대부분이 유럽에서 가장 가난하고 비참한 생활을 하는 농노였음에도, 러시아 황제의 생활은 여타 유럽 왕실보다 화려하고 호화로웠던 것처럼 보인다.
이후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 방문하였다. 일리야 레핀의 초상화와 러시아 역사화가 일품이었다. ‘아들을 때려 죽인 이반 뇌제’ 그림으로 유명한 그는 동시대 활동하던 러시아 문호, 작곡가 등의 초상을 다수 제작하였는데, 특히 무소륵스키와 톨스토이의 초상화는 그들을 실제 대면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 충분하였다.
박물관에 미술관까지 구경하고 나니 이미 3만보를 넘게 걸었다. 더 이상은 무리다. 저녁으로 러시아 전통요리인 스트로가노프를 먹고, 교향악단의 공연을 본 후 마무리해야겠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교향악단의 하나인 차이코프스키 교향악단은 차이코프스키 콘서트홀을 주 공연장으로 한다. 마침 오늘 차이코프스키 교향악단의 공연주제는 ‘러시아 작곡가’이다. 운 좋게 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무소륵스키의 짧은 곡 ‘Dawn on the Moskva River(모스크바강의 새벽)’에 이어 라흐마니노프의 랩소디, 그리고 쇼스타코비치 10번 교향곡이 이어진다.
그중 압권은 쇼스타코비치 10번 교향곡 3악장과, 앙코르 곡인 ‘The Lady and the Hooligan’이었다. 우리나라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곡들이기도 하고, 특히 10번 3악장은 해석이 엇갈리는 작품인데, 명문 교향악단답게 작품 해석이 힘 있고 경쾌했다.
분명 소련과 러시아 혁명에 대한 관심으로 러시아를 방문했는데, 되려 제정시대의 문화유산에 푹 빠지게 생겼다. 19세기 러시아의 서커스, 클래식 작품, 미술품 모두 일류였다. 다만 공연 수준에 비해, 관객 수준은 아쉬웠다. 러시아 관객들은 공연 중 휴대전화 사용은 기본이었고, 빈 자리가 있으면, 표와 상관없이 좋은 좌석을 찾아 좌석을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또한 공연자 인사가 남았음에도 공연이 끝나자 밀물 빠지듯 자리를 비웠다. 그럼에도, 낮은 관객 수준이 높은 수준의 공연이 주는 감동과 여운을 막진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