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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 따위 레시피라니

독서 일기

by 그사이
<또 이따위 레시피라니>
The pedant in the kitchen
줄리언 반스 지음
공진호 옮김


또 이따위 레시피라니. 1일

조금씩 봄앓이 회복의 단계를 지나고 있다.

약간의 문제라면 무력감은 언제나 더한 강도의 충격으로 현실로 돌아오게 만든다는 것이다. 작년도 그 이전에도 그랬으니 이제 정신을 차릴 만도 한데 올해의 봄도 변함이 없었다.

아직도 아침에 눈을 뜨지 못하고, 여전히 살림을 등한시하지만 글이 눈에 들어온다는 것은 고무적으로 생각된다. 그렇다고 새로운 시도를 할 만한 기운이 아직은 없다. 뭔가 읽었던 책을 다시 읽을 때 편안함이 있다. 책장 앞으로 다가가 표지의 색이 조금 바랜 책을 꺼낸다.

<또 이 따위 레시피라니>

그 제목 한번 호기로운 것이 마음에 든다.


나는 부엌에서 서기만 하면 노심초사하는 현학자가 되어 가스레인지의 온도와 조리 시간을 엄수한다. 나 자신보다는 주방 기구를 신뢰한다. 손가락으로 고깃덩어리를 찔러 익은 정도를 알아보는 일은 아마 영원히 없을 것이다. 레시피대로 요리할 때 내 마음대로 하는 부분은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재료를 더 넣는 것뿐이다. 이 수칙에는 오류가 없지 않은데, 그 사실은 언젠가 고등어와 마티니, 빵가루로 완전히 엉망인 요리를 만듦으로써 확인되었다. 손님들은 그 요리로 포식하기보다는 술에 취하고 말았다.

또 이따위 레시피라니. P.23


또 이따위 레시피라니. 2일

골치 아픈 일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일이나 돈을 지출할 일이 동시에 생기는 것은 언제나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신기한 것은 내가 무방비로 있거나 지독한 허무에 빠져있을 때 경종을 울리듯 일어난다. 최근에 여러 일이 동시다발로 벌어졌는데 허둥대고, 두통을 느끼는 사이에 샛길로 빠져있던 정신머리를 고쳐 잡게 되었다.

좋은 일인가?


이 책은 미숙한 요리자들이 갖게되는 고뇌와 좌절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해가 되고 ‘그렇지!’ 하며 무릎을 치게 되는 건 나 역시 그 시간을 지나왔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밥상을 차릴 때 예민해지기도 하고, 요리를 전혀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긴장하기도 한다.

무겁고 커다란 무를 썰때 꼭 칼로 썬 맛이 다르다고 고집을 부리며 아픈 손목으로 무리를 한다. 하지만 채칼로 순식간에 썰려나온 무채여도 집밥으로 먹기에 별 다르지 않음을 안다.

"내가 밥할 때 부엌에 들어오지마. 메뉴가 뭐냐고 묻지마. 부를 때까지 아무도 꼼짝마."

맛있는 순간을 위해 분, 초를 다투는 기록을 내야하는 사람처럼 전투적으로 요리한다. 원하는 순간에 딱 맞춰서 식탁에 앉아 바로 그 순간에 음식을 먹으라고 하기도 한다. 나는 부담스럽게 요리하고, 먹는 사람에게 부담를 주고 있었다.

마치 줄서는 맛집이라 소문났지만 성미가 고약한 욕쟁이 할머니처럼 군다.

사실 나는 그런 가게는 가고싶지 않다.


음식이 식으면 좀 어떤가? 마늘 넣는 것을 좀 잊으면 어떤가?

내가 부엌에서 좀 더 여유로운 마음을 가진다면 우리 집의 요리자와 먹는 자에게 모두 좋은 요리가 탄생할 것 같다.

요즘 간을 못맞추는 나에게 얄미운 남편이 한마디 한다.

"집 나간 장금이의 미각은 언제 돌아온대?"


즉, 요리란 한바탕 일사불란하게 준비해서 식사하기 몇 초 전 절정에 이르렀을 때 짠! 하고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게 문제다. 설령 그런 일이 가능하다 손 치더라도(가능하지도 않지만) 우리가 요리사 노릇만 해야 하는 게 아닌데 우리는 그 사실을 망각한다. 웨이터 노릇, 지배인 노릇, 코트 보관원 노릇, 재기 발랄한 옆자리 손님 노릇도 해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주방 용품 매장은 온갖 유용한 도구, 시간을 절약해 주는 장비 등을 판매한다. 그렇지만 가장 유용하고 해방감을 주는 것은, 긴장했을 때를 대비해서 눈에 잘 띄는 곳에 붙여놓을 수 있는 ‘ 여기는 음식점이 아니다’ 표지판일 것이다.

또 이 따위 레시피 라니 p.47-p.48


또 이따위 레시피라니. 3일

세상에나, 오늘이 5월 12일이니 2주가 넘게 책을 덮어두었다는 뜻이다. 5월은 바쁜 달이니 그럴수 있다. 하지만 책이 읽히지 않는 현상은 날이 더워져서인지, 생각이 더워져서인지 잘 모르겠다.


요즘 값이 저렴해져서 기분을 좋은 식재료인 오이로 시원하게 오이탕탕이를 식전 채소로 만들려고 한다.

오이탕탕이는 먹어 본 적이 없지만 만들게 된 음식이다. 어딘가에서 레시피를 보고 적어두었는데 쉽고 빠르니 안 해 볼 이유가 없었다. 시도는 성공이었고, 이제 레시피가 없이도 종종 만드는 여름 음식이 되었다.

단, 탕탕 두드려야 하니 밤엔 하지 않는다.


본격 탄수화물 식사를 하기 전에 채소를 먼저 먹으면 건강에 좋다고 한다. 글쎄..

아무튼 손해 날 일은 없으니 우리 집 식탁에 적용하려고 노력 중이다.

주로 상추와 깻잎에 밥 없이 나물반찬만 넣어 쌈으로 두 개쯤 우걱우걱 씹어 먹거나 살짝 삶은 브로콜리나 양배추를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다. 또는 참깨 소스를 조금 뿌린 케일, 방풍나물, 치커리를 먹기도 한다.


아, 그렇지, 나만의 요리 파일이란 것도 있다. 이런 걸 만들려면 신문이나 잡지에서 오린 레시피를 모아두는 일종의 작은 스크랩북 같은 게 필요하다. 이에 한마디 조언 하자면, 적어도 두 번은 만들어보고 오래도록 쓸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안 다음에 그 레시피를 파일에 포함시키는 게 좋다. 그런 스크랩북은 오랜 세월과 함께 우리의 이상한 요리 역정에 증인이 되어줄 것이다.

또 이 따위 레시피 라니 p.58-p.59


또 이따위 레시피라니. 4일

오늘은 미역국을 끓이기로 어젯밤부터 생각해 뒀다.

누구의 생일도 아니지만 몇 달 전 받아서 고이 모셔둔 은행장이 보내주었다는 고급 산모용 미역이 생각 나서다.

요리초보였던 신혼시절에 미역국은 레시피 없이 누구라도 실패가 없는 국이란 생각을 했다. 초대받은 그녀의 식탁에서 계란 푼 미역국을 먹어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내가 아는 한 그녀가 태어나서 30년이 넘도록 계란을 푼 미역국을 먹은 적은 없었을 텐데 신기한 미역국을 끓였다. 미역국을 실패할 수도 있고, 미역국이 창의적인 음식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참, 나의 경험이 없을 뿐 다른 지역이나 집안에서 계란 푼 미역국을 먹을지도 모른다.)

요즘 그녀는 국을 사 먹는다고 한다. 그것 또한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식탁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이 편안하고 맛있으면 된다.


요리를 시작하고 가장 먼저 배우게 되는 교훈은, 요리책이 아무리 솔깃해 보여도 어떤 요리들은 반드시 음식점에서 먹어야 제일 맛있다는 사실이다. 내 경험으로는 디저트가 대개 그렇다. 생지가 양파지처럼 얇고 살짝 깨물어도 바삭거리고, 표면의 글레이즈가 반짝이는 그 완벽한 애플타르트를 만드는 건 어떨까? 일찌감치 꿈을 깨는 게 좋다.

또 이 따위 레시피 라니 p.74-p.75


또 이따위 레시피라니. 5일

날씨가 꾸물꾸물 거리더니 갑자기 어두워지며 폭우가 쏟아진다.

일주일치 일기예보를 보면 강수량이 많지는 않으나 비소식이 종종 들어있다.

‘설마 벌써 장마가 시작하려나?’

축축한 날에 어울리는 수제비 반죽을 주물주물 주물러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반죽이 숙성되는 사이 책을 읽는다.


그녀의 [채소 요리]는 로버트 루이 스티븐슨의 말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모든 책은 저자가 친구들에게 보내는 회람과 같다.”
그렇다. 하지만 최고의 책은 저자를 알지도 못하는 독자들까지 저자의 친구라고 믿게 만드는 책이다.

또 이 따위 레시피 라니 p.109-p.110


또 이따위 레시피라니. 6일

뭔가 여유롭게 생각되는 토요일인 건 왜일까?

“아하! 아이들이 외출한다니 점심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된다.”

남편과 둘이 짬뽕을 시켜 먹기로 타협을 봐두었다.

밥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여유로운 마음이 생기니 책장이 잘 넘어간다.

드디어 이 독서를 마칠수 있겠다.


요리는 즐거움이 전부여야 하지 않을까? 계획을 세우고 장을 보고 요리를 할 기대감에서 오는 즐거움, 지나치게 자축하지 않는 흐뭇한 회상의 즐거움, 하지만 그런 즐거움을 누리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드문가. 너무 마음을 졸이다 기대감에서 오는 즐거움을 잃고, 술에 취해 그 시간의 대부분을 망각하고, 숙취 속에서 생각나는 것이라곤 계속 재연되는 설거지 장면으로 축소된 것일 뿐인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또 이 따위 레시피 라니 p.164 - p.165

책을 덮는다.



독서 그 후.

다시 읽는 얇은 책인데도 무척 오래 걸렸다.

독서 스타일에 관한 문제 이긴 한데 <또 이 따위 레시피 라니>는 내 관심사인 요리라는 좋아하는 글소재와 외국어로 된 이름들이 아주 많이 나오는 싫어하는 요소가 함께 들어있다.

누군가는 나처럼 낯선 요리책 저자들의 이름, 구경도 해본 적 없는 요리들로 인해 흥미를 잃을수 있다는 아쉬운 생각이 든다.

꽤 자주 등장하는 요리책들이 내게 필요할 것 같지 않으니 후루룩 후루룩 지나쳐도 상관없었다. 간혹 '요리책의 저자가 말했다.'라고 하면 몇 장 앞으로 돌아가는 일이 생기지만 내용 전개에 별 지장을 주지 않는다. 다시 읽는 책이지만 초반부에 어쩔 수 없이 집중력을 방해하는 요소로 인해 독서가 길어진 탓도 있다.


독서를 하며 계속 제목이 기가 막힌다고 생각한다. <The pedant in the kitchen>라는 원제목이 어떻게 <또 이 따위 레시피 라니>라고 번역 되었을까 궁금하다. 원작자와의 교류가 있었을까?

내가 번역가가 아니지만 만일 내 마음대로 직역하여 '부엌 안의 현학자'라고 했다면 아마도 책이 덜 팔렸을 것 같다.

(지루해 보여 나도 사지 않았겠다.)


현학자가 요리해 주는 그녀.

줄리언 반스 작가는 요리사가 아니고, 맨부커상을 비롯한 여러 유수한 상을 수상한 작가다.

자신을 현학자라고 말하는 그는 부엌에 들어가 아내에게 직접 요리를 해준다. 그 점이 아주 마음에 든다.


부엌에서 직면하는 문제들을 말할 때 요리책의 메뉴와 식재료의 이름들이 낯설어 집중이 안되더라도 조금 참을성을 가지고 읽어야 한다. 그러다보면 보통의 한국사람인 나에게도 충분한 공감대를 형성되고, 작가의 부엌으로 빠져 들어가게 된다.

쉽게 요리책의 레시피와 요리사인 작가를 신임하고, 각종의 도구들만 있다면 뚝딱 하고 요리책의 사진처럼 요리가 되어 나올 것을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십중팔구는 사진과 다른 내가 만든 결과물에 대해 좌절한다. 그 때 우리가 하고 싶은 마음의 소리를 작가는 시원하게 직접 해준다.

이게 뭔지 이 빌어먹을 책 어딘가에 설명을 좀 해주면 좋잖아. 이 친구야.
요리한다는 것은 법석 떠는 과정을 거쳐 불확정성을 확정성으로 변형시키는 일이다. (p.138)


요리에 관한 글을 쓸 때마다 나는 무척 고민을 한다.

사실 김치찌개를 끓일때도 방법이 매번 조금씩 바뀌며 기분에 따라 맛도 달라진다. 예전에 할머니나 엄마에게 요리법을 물으면 왜 우물쭈물 하며 정확하게 말을 못했는지 이제는 알겠다.

사진은 가장 먹음직스럽고 예쁜 데코가 완성 됐을 때 찍는 것뿐이다. 다시 만나지 못할 돼지불고기의 모습 같아서 나는 자랑하고 싶어진다.

'자랑하고 싶으면 차라리 인스타를 하지 그래.'라고 사실 속으로 말할 때가 많다.

현명한 여러분이 레시피에서 아이디어를 얻고 유연하게 요리할 거라 믿지만

"제발 나의 레시피를 전적으로 믿지 마세요!"라고 끝부분에 적고 싶다.

언젠가 레시피를 포함한 요리 에세이집을 내고 싶은 희망을 꿈꾸다가 매번 음식의 맛이 달라질 때면 아주 순순히 포기하게 된다. 요즘처럼 음식의 간을 못맞출땐 연재 중인 음식에 대한 글도 종료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아주 쉽게 보이는 레시피와 먹음직스러운 사진으로 가득 찬 요리책에게 배신당하는 기분. 그 기분은 특히나 나처럼 원리원칙주의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일수록 쉽게 느끼게 된다. 나는 요리를 하다가 화가 났던 기억을 꽤 가지고 있다.

게다가 최근엔 요리법 동영상과 각종 기능을 탑재한 신기한 요리 도구와 반짝이는 조리용 기계들에게서 까지도 배신감을 느끼기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대체 왜 똑같이 안 되는 거지? 내가 뭘 잘못한 거지?"

실패를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대상에 대한 불신의 마음을 갖게 되는 기분이 좋지 않은 경험을 하게 된다.

이 책에선 충분히 그 마음을 공감해 주고 부엌에 들어가서 일어나는 일에 있어 중요한 것은 혼자서 해낸 성공적인 요리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자신감을 심어준다.

혼자서 부엌일과 먹거리를 완벽히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내 마음의 짐을 덜어준다.


요리 에세이라고 생각하고 읽기 시작한 이 책은 마지막 부분에 들어서면 이 책이 요리에 대해서가 아닌 마음에 대한 이야기임을 느끼게 되며 집중을 시킨다.

처음에 요리 초보인 남자가 하는 부엌일에 대해 조금 우습게 여기기도 했다.

"어디 요리에 대해 알면 뭘 얼마나 알고 얘기하는지 들어보자."

그 생각은 어느새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요리하는 이가 가진 소중한 마음을 이해해 준다. 평생 솥뚜껑 운전수로 살았던 내 시간이 가치 있어진다. 그렇다고 이 책이 단지 부엌에서 요리를 하는 사람에게만 공감되는 내용은 아니다.

요리자는 음식을 만드는 동안의 따뜻한 마음이란 최고의 조미료로 첨가해 맛을 내고 완성한다. 완성된 요리는 시각과 미각을 충족하지 못하더라도 충분한 양으로 담긴 마음을 느끼며 먹는 사람에겐 완전한 영양을 충전시키는 풍성한 만찬 같은 한 그릇이 된다.


내 아이들에게 한 말이 있다.

"누군가 너를 위해 음식을 만들었다는 건 사랑이야. 당연한 건 없어. 고맙게 생각하고 감동받았음을 전해야 해. 꼭!"

귓등으로 들어겠지만 마음속 한구석에 남았기를 바란다.

요리 에세이가 아닌 부엌 속 사색을 다루고 있는 이 책도 그 말을 전하고 있다.


바로 그거다. 빵을 고르는 일. 버터를 마음대로 마구 쓰는 일. 부엌을 혼돈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일. 재료를 조금도 낭비하지 않으려는 일. 친구와 가족을 먹이는 일. 다른 사람들과 음식을 나누는, 단순화할 수 없는 사회적 행위에 참여하는 일. 내가 아무리 트집을 잡고 항의의 말을 했어도 콘래드의 말이 맞는다. 그것은 도덕적 행위다. 온전한 정신의 문제다. 그에게 마지막 말을 하도록 하겠다. "성실한 요리는 평온한 마음, 상냥한 생각, 그리고 이웃의 결점을 너그럽게 보는 태도(유일하게 간절한, 낙관의 형태)를 은밀히 증진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요리는 우리에게 경의를 요구할 자격이 있다."

또 이 따위 레시피 라니 p.192 - p.193


줄리언 반스는 할 말이 더 있지만 무언가 끓고 있는 부엌으로 가야 했다.

두 번째 독서인 만큼 금세 읽을 거란 생각은 빗나갔다. 가벼운 제목과 그림으로 보여주는 겉모습을 가졌으나 포장지를 벗기면 나오는 노란 책은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며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하는 책이 되었다. 예상보다 긴 시간이 걸린 것은 아마도 사색이 길었다는 뜻인 것 같다.

독서는 읽는 상황에 따라 다른 것을 느낀다. 요즘 내 상황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쉽게 하고 싶던 독서를 어렵게 마쳤다.


줄리언 반스의 부엌 사색을 덮고, 콩나물 국이 끓고 있는 내 부엌으로 간다.

이제 나만의 새롭고 엉뚱한 부엌 사색을 계속 만들어 갈 것이다.

‘나도 부엌 사색 글을 쓸 수 있을까?’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이탕탕이 레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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