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전쟁 같은 사랑 아니 독서일기
< 노르웨이 숲 >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노르웨이 숲. 1일 (2025년 6월 21일)
장마가 시작되니 빗속을 다닐 가족들이 늘 걱정이다.
주말이어서 걱정 없이 늦잠을 자도 좋을 아침인데 눈이 일찌감치 떠졌다.
비가 소강상태에 들어간 덕분에 모처럼 창문을 활짝 여니 시원하다. 조용한 창밖을 한참 지켜보다가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커피를 내려 독서대 앞에 앉는다. 전날밤 독서를 끝낸 <흰>을 책꽂이에 넣고, 바로 책을 꺼내어 독서대 위에 얹어두었다.
묵혀둔 책. 무거운 책 <노르웨이 숲>
“이번엔 완독 해보자.”
책을 겨우 한 장을 넘기고서 주섬주섬 음악을 찾는다. 비틀즈의 노래인 노르웨이 숲.
노래가 없는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다 듣고 나서 또 음악을 찾는다. 비행기 안에서 비틀즈의 음악 뒤에 이어 흐른 빌리조엘의 음악은 무엇이었을까? My life였을까?
나는 하루키의 글이 읽기가 힘들어 늘 멈추곤 한다. 책을 읽다가 그새 딴짓을 하다니 또 멈추려는 건가?
우리는 누군가 별거 아닌 아주 작은 공감으로부터 큰 위로를 받는다. 그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법칙일 것 같다.
“It's all right now, thank you. I only felt lonely, you know."
"Well, I feel same way, same thing. once in a while. I know what you mean."
"I hope you'll have a nice trip. Auf Wiedersehen!"
”안녕!(Auf Wiedersehen!)“
노르웨이 숲. p.11
노르웨이 숲. 2일
시작했다는 중부지방의 장마는 주춤했다. 쨍하고 볕이 들 모양이다.
일요일 아침은 자동차 움직임조차도 조용하다. 오늘도 아침이 조용하다.
점심메뉴는 며칠간 해둔 나물 반찬을 모아 비빔밥으로 정하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으... 역시나 하루키의 책은 진도가 느리다.
'일본에 대한 내 (무)조건적 반감 때문일까?' 이것은 말도 안 되는 핑계다.
하루키를 계속 시도하는 건 <벽과 알>에 담긴 그의 생각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덮을까 말까 하며 집중하지 못한 채 책을 읽는다. 말까로 기울던 찰나에 마음을 잡아당기는 첫 문장을 만난다. 마침내.
왜 밤에는 국기를 내리는 것일까. 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밤에도 국가는 존속하며, 일하는 사람도 많다. 선로 노동자나 택시 기사, 바의 호스티스, 야근 소방관, 빌딩 경비원, 그렇게 밤에 일하는 사람들이 국가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공평하다는 느낌이 든다.
노르웨이 숲. p.30
노르웨이 숲. 3일
아무래도 진도가 잘 안 나가는데 빨강과 초록으로 이루어진 원색적인 겉표지를 벗기니 손에 잡히는 느낌이 조금 낫다. 거슬리는 새빨간 보람줄도 자를까?
<흰>의 하얀 보람줄이 참 좋았는데..
앗! 나의 실망한 표정을 작가에게 들킨 기분이다.
정말 신기하다. 작가는 내 마음을 아는 것 같다. 책을 그만 덮을까 하던 나를 또 잡는다.
나오코는 고개를 들고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런 마음, 알겠어?”
“많건 적건 누구에게나 그런 느낌이 있어. 다들 표현하고 싶은 걸 정확하게 말 못 해서 안절부절못하고 그러잖아.”
내 말에 나오코는 조금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노르웨이 숲. p.47
노르웨이 숲. 4일
진도 참 안 나가네..ㅜㅜ
그런데 또 잡는다. 글로.
한강의 “흰”처럼 하루키의 “삶”도 죽음을 내포하고 있다.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
노르웨이 숲 p. 55
노르웨이 숲. 5일
비누의 털이 참 귀엽게 자랐다 싶으면 그것은 미용 가는 날이 도래했다는 뜻이다. 간밤에 비누 모양 수세미를 떴는데 영 비누 같지 않다. 오히려 짱구네 흰둥이 같다. 다시 여기저기 비누와 비슷한 강아지 모양의 도안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찾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비누는 비누밖에 없으니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 강아지 비누는 얼마나 특별히 귀여운지 모른다. 세상에서 제일.
앗! 오징어 게임의 마지막 시즌이 열렸다. 그럼 오늘은 이만!
'대체 왜 이렇게 하루키의 글을 읽으려는 걸까?'
내가 가진 물음의 대답을 책 안에서 찾게 되는 것은 언제나 신기하다.
그러니까 읽는 거지. 남들과 똑같은 것을 읽으면 남들과 똑같은 생각밖에 할 수 없잖아.
노르웨이 숲. p.68
노르웨이 숲. 6일
날이 덥고 습해서인지 아주 아주 느리게 책을 읽는다.
1987년도 여름. 우기였던 도쿄는 끔찍하게 습했다. 아주 짧게 머물렀지만 쩍쩍 달라붙던 습기가 종종 생생하게 느껴지곤 한다.
6일 차인데 100쪽을 넘기지 못하고 있는 건 습기 탓인가? 하루키 탓인가?
이상한 건 재미없거나 지루하지도 않고, 심지어 글은 훌륭하고 내용이 흥미로운데도 그렇다는 거다.
참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나 나오코는 언제까지고 열여덟이나 열아홉 언저리를 왔다 갔다 하는 게 맞지 않느냐는 느낌이었다. 열여덟 다음은 열아홉이고, 열아홉 다음은 열여덟, 그렇다면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녀는 스무 살이 되었다. 그리고 가을이면 나도 스무 살이다. 죽은 자만이 영원히 열일곱이었다.
노르웨이 숲. p.80
노르웨이 숲. 7일
이동형 TV는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다. 꼭 봐야 하는 것도 없는데 왜 자꾸 켜게 되는지 모르겠다.
가족들과 점심을 먹으며 식탁 앞으로 가져와 의미 없이 켜둔 tv에서 오래된 영화를 소개한다.
소지섭이 손예진에게 노르웨이 관련 책을 선물한다. ”노르웨이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 여자는 의아한 얼굴로 남자를 쳐다본다.
”그때도 <노르웨이 숲>이란 책을 읽고 있었잖아. “
미역국과 두부조림을 만들어 일요일 점심을 먹고 있었다. 나는 열심히 하던 숟가락질을 멈추고 말한다.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책이야. “라고 말해 버렸다. 아뿔싸.
입 밖으로 나온 말의 무게란 강력한 마법과도 같다.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내가 한 말을 책임지기 위해 독서를 끝낼 명분이 되었다.
왜 자꾸만 이 책은 내게 멈추지 말라고 하는 건가?
공표를 해서인지 6일 동안 넘기지 못한 100쪽을 넘어가고, 갑자기 술술 책이 읽혀나간다.
“어떤 사람들한테 사랑이란 그렇게 아주 사소하고 쓸데없는 데서 시작되는 거야. 그런 게 없으면 시작되지가 않아.”
노르웨이 숲. p.160
노르웨이 숲. 8일
곧잘 읽히다가 글 속에 숨었던 복병을 만난 후 책을 덮었다. 몇 권의 다른 책을 읽고, 열흘 만에 다시 <노르웨이 숲>으로 돌아왔다. 이 책을 중단하기엔 이미 너무 많이 온 것이 아깝다.
그사이 날씨는 마른장마처럼 보이더니 끝이난 거라고 한다.
내가 돌아온 오늘은 아침부터 흐릿하더니 다시 비가 내린다. 내일도 비, 모레도 비로 예보되어 있다.
장마도 나처럼 돌아온 건가?
<노르웨이 숲>은 항복하고 싶은 순간마다 나를 붙드는 문장을 던진다.
사람들은 제각기 행복한 듯이 보였다. 그들이 정말로 행복한지 아니면 그냥 그렇게 보일 뿐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어쨌든 9월 말 기분 좋은 한나절에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고 그래서 나는 평소보다 더 외로움에 젖었다. 나 혼자만 이 풍경 속에서 멀리 떨어진 것 같았다.
노르웨이 숲. p.165
노르웨이 숲. 9일
냉장고 서랍이 훤히 보인다. 채소가 똑 떨어졌다.
장을 보러 가 커다란 양배추와 오이 다섯 개, 양파와 부추, 호박 세 개를 사서 돌아왔다. 요즘 제철이고 값이 싼 채소인 오이와 호박으로 거의 매일 무언가를 만든다.
새콤달콤한 오이 무침과 호박을 듬뿍 넣은 고추장찌개를 해야겠다.
어떡하든 이 책의 끝을 보기로 한다. 사생결단.
그래야 나는 작가 하루키와도 끝을 낼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이 지겹다.
이 책은 흥미롭다.
이 책을 버리고 싶다.
이 책 속의 소년이 마음에 든다.
300페이지를 넘기며 만감이 교차한다.
몇 권의 독서 시도를 통해 자세히 묘사하고, 상세하게 설명하는 작가의 특이한 글 표현에 대해 조금 알 것도 같다. 전적으로 내 생각이지만 나와 약간 비슷한듯한 그 디테일한(?) 쪼잔한(?) 섬세한 성격이 마음에 든다. 어쩌면 독자 말고, 사람으로서 친구가 되면 좋을 것 같다는 엉뚱한 상상을 한다.
아무튼지 간에 이 책이 내 책꽂이에 남겨질 것 같진 않다. (이 말을 후회하진 않겠지?)
“배가 고파서 오이를 먹을 생각인데 괜찮을까요?” 나는 물어보았다.
미도리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세면장으로 가서 오이 세 개를 씻었다. 그리고 접시에 간장을 조금 붓고 오이에 김을 말아 간장에 찍어 아작아작 씹어 먹었다.
“정말 맛있네요. 단순하고 신선하면서 생명의 향기가 나요. 좋은 오이예요. 키위보다 훨씬 좋은 것 같아요.”
나는 한 개를 다 먹고 하나를 더 집어 들었다. 오이를 두 개 먹어 치우고서야 겨우 한숨을 돌렸다. 그리고 복도에 있는 가스스토브에서 물을 끓여 차를 타서 마셨다.
“물이나 주스 드실래요?” 나는 물어보았다.
“오이.” 그가 말했다.
노르웨이 숲. p.377- p.378.
노르웨이 숲. 10일
이 소설에 대해서 왜 말이 많았는지 알겠는 내용이 참 많이도 나온다.
당혹감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나처럼 토시 하나까지 놓치지 않는 독서법을 하는 사람은 괴롭다.
이 독서를 끝내면 이젠 정말 끝을 낼 수 있겠다고 생각이 든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 글로 쓰여있다.
당신에게 나오코는 지고의 행복과도 같은 존재인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그냥 눈앞에 있는 사는 게 서투른 여자애에 지나지 않아요.
노르웨이 숲. p.458- p.459
노르웨이 숲. 11일
장마도 아니고 태풍도 아닌 비가.
너무 많은 비가 온다.
모두 무사하기를..
막바지에 다다랐다. 길고 긴 힘든 독서에 대한 나의 마음이 1969년 와타나베의 마음 같다.
소년이 진흙탕에서 빠져나왔음에 마음이 놓인다. 드디어 내가 그를 이해할 수 있게 됐다.
1969년은 내게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진흙탕과도 같았다.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신발이 쑥 빠져 버릴 것 같은 깊고 무겁고 끈적거리는 수렁. 그 진흙탕 속을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걸어갔다. 앞에도 뒤에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끝도 없이 시커먼 진흙탕 길이 이어질 뿐이었다.
노르웨이 숲. p.460
마지막 장을 덮었다. 진흙탕에서 빠져나와 깨끗한 물로 씻어낸 듯 남은 것이 없다.
이제 깔끔하게 끝내기로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안녕.
2025년 7월 17일.
독서 그 후.
긴 장마 같은 독서가 끝났다.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외한 모든 책이 읽기 어려웠고, 완독 하지 못했다.
이 책의 복병은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 사실 그전의 글들은 복병이 없음에도 힘들었으니 핑계일 수도 있다.
이 글을 외설적이라고 해야 하나, 선정적이라고 해야 하나?
독서하는 동안 고 마광수 교수가 생각났다. 오래전 서점에서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란 에세이 제목을 보고 화들짝 놀라 읽지도 않고, 혹시 손에 닿을까 매대로부터 멀리 돌아선 것이 미안한 생각이 들어 검색을 해보니 품절이다. 그는 시대적 금서를 짓고, 정치적 이슈가 되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 복권이 되었지만 마음에 병이 들어있었다. 안타깝게도 시대를 너무 일찍 살다간 마광수 작가에게 조의를 표한다.
지금은 오만가지 자극이 난무하는 시대에 산다. 하지만 별난 결벽증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아무튼 내겐 여전히 힘든 요소다.
이 책은 운치 있는 비틀즈의 노래 제목을 달고 있다. 책을 읽는 내내 독자를 낚기 위한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상실의 시대>라는 아주 잘 어울리는 다른 제목으로도 번역이 되어있는데 왜 <노르웨이 숲>으로 유명해졌을까?
책의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다시 제목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비틀스의 몽환적인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의 가사를 곰곰이 들어보았다.
(사실 드문드문 알아들을 뿐 내 독해력이 그다지 쓸만한 편은 아니다. )
앞부분은 나오코의 방이 연상되었다. 마지막은
- 아침에 일어나니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는 나무토막을 불속에 던져버린다? 불을 지른다? -
"아, 결국 나오코는 그렇게 연기처럼 꿈처럼 흔적 없이 사라졌구나.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노래 자체구나."
이유를 명료하게 설명할 순 없지만 노래와 글이 주는 느낌이 똑같았다. 나는 이제 <노르웨이 숲> 이란 제목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수년간 하루키의 글은 왜 포기하지 않는지 이유를 모른 채 나는 쥐지도 놓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눈앞에서 없어져 버려야 끝나!"
벼르고 벼르던 긴 책을 읽으며 치를 떨고 급기야 하루키의 책을 죄다 내다 버리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글의 매력을 알아내지 못하는 것은 언제나 나를 괴롭히는 일이다. (고약한 성정이다.)
“그래. 무조건 마지막 장을 보자. 그리고 깨끗하게 이별하는 거야. “
라고 마음을 먹으니 글이 죽죽 읽혀나갔다.
멈춤의 위기마다 문장은 나를 잡았고, 마침내 “병실에 울려 퍼지는 아작아작 소리가 나는 청량한 오이”는 나의 돌파구가 되어 독서를 마칠 수 있었다.
글 속 주인공인 와타나베는 깊숙한 곳에 간직한 착한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 표현해 준다. 혹시 작가는 자신을 그려낸 걸까?
그동안 좋은 글에 공감하지 못하는 나를 이해할 수 없었고, 참을 수 없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은 풍경, 사람의 모습, 식당 이름, 음식을 먹는 방법 등 등 상세히 종알종알 많은 것을 독자에게 말해준다. 그의 글 속엔 내가 좋아하는 친절함이 가득 들어있다. 그러나 매력을 알게 되었어도 결국 우리는 친해지지 못하고 이별을 한다. 어쩌면 하루키란 작가와 어떡하든 친해지고 싶었던 욕심이었던 것 같다.
관계란 아무 문제가 없이도 잘 지낼 순 없다는 것을, 억지를 부린다고 가능한 것도 아니란 것을 깨우치게 된다. 독서를 통해서..
나는 꼭 한 번은 오이를 김으로 감싸서 간장에 찍어 먹어보려 한다. 며칠 전 요리글에 썼던 데마끼와 비슷한 맛이라면 나는 그 맛을 좋아할 것 같다. 그리고 아삭거리는 오이 소리에 와타나베와 하루키가 생각날 것 같다.
청각과 미각으로 남을 독서를 마친다.
<노르웨이 숲>이 내게 남긴 것은 비틀즈 노래와 오이다.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