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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징가 계보학

독서 일기

by 그사이


마징가 계보학
권혁웅
시집


<마징가 계보학> 1일.

폭염과 열대야의 날이 이어지고 있다.

이 책을 들썩, 저 책을 들썩거려보아도 집중하기가 어렵다.

이럴 땐 표지와 제목에 이끌려 책을 꺼내게 되는데 독자를 낚시질하는 표지와 자극적인 제목은 기대를 하게 만든다. 어쩌면 그래서 더 집중이 안되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한다.


묻어둔 시집을 고른다. 제목 한번 자극적이다.

어디...

“뭐 이런 시가 다 있어!”

마징가 계보학

1. 마징가 Z

기운 센 천하장사가 우리 옆집에 살았다 밤만 되면 갈지자로 걸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고철을 수집하는 사람이었지만 고철보다 진로를 더 많이 모았다 아내가 밤마다 우리 집에 도망을 왔는데, 새벽이 되면 계란 프라이를 만들어 돌아가곤 했다. 그는 무쇠로 만든 사람, 지칠 줄 모르고 그릇과 프라이팬과 화장품을 창문으로 던졌다 계란 한 판이 금세 없어졌다

2. 그레이트 마징가
3. 짱가
4. 그랜다이저

마징가 계보학 p.12.


<마징가 계보학> 2일.

오래전 한성여고에서 대입 학력고사를 치르고, 산을 넘어 고려대를 지나 집으로 걸어갔다.

그날은 눈이 소복소복 내렸다.

눈송이의 차가운 촉감이 시원했고, 재수생의 마음은 서늘하기도 했다.

나는 한성여고로 저물던 눈부신 해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그 해가 그립다.


보통 책에 붙은 해설을 읽지 않는데 사실 2부까지 읽은 후 끝부분으로 넘겨 해설을 읽어야 했다. 이 책에 담겨있는 시들을 읽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된다.

하루 만에 시집을 완독을 했다.

이틀째인 오늘은 해설 부분을 한 번 더 읽고, 몇 개의 시를 다시 읽었다.


마징가 계보학.

목련의 알리바이.

떡집을 생각함.

만리장성을 생각함.

해는 보문사에서 뜨고 한성여고로 진다.

내게는 느티나무가 있다 1

내게는 느티나무가 있다 2

떡집을 생각함

권혁웅

그 집은 온갖 진미의 공장,
집주인이 가래떡을 넣고 돌리면
작고 하얀 얼굴들이 아옹다옹 한방에서 나와
떡국 속으로 쏟아져 들어갔지
그가 내놓은 시루떡은
팥고물로 새까맸지 안방 구들장처럼
다습게 녹아 있었지
아버지가 형과 누나와 나를 떡메로 쳐서
네모나게 잘라두면
그가 가루를 묻혀 인절미를 만들어냈지
우리 집에 없는 건 그 콩가루였네
씹듯이 우리를 건너다보았네
우리는 얻어맞은 찹쌀처럼
차지게 손을 잡았지 개피떡에 든 소처럼
조그맣게 웅크렸지 그가
아픈 자리마다 참기름을 발라주었네
먹다 남은 막걸리와
뜨거운 물을 멥쌀에 개어 증편을 만들 때엔
우리 마음도 함께 증발했지
그래, 우리는 그렇게 그 집을 떠났지만
지금도 그 집을 생각하면
나는 백설기처럼 마음이 하얗게 되네
돌아보지 않아도 눈이 내리네

마징가 계보학 p.82


시집을 덮는다.

소설도 아닌 시집을 하루에 다 읽는 것이 가능한가?

소설처럼 궁금하여 자꾸만 다음 장을 넘기고 싶어졌다. 하루 만에 다 읽은 최초의 시집으로 기록한다.




독서 그 후.


무슨 이런 시가 다 있을까?

<마징가 계보학>이라는 가벼워 보이는 제목의 탈을 쓰고 묵직함을 담고 있다.

솔직히 아직도 이 시집을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나는 서평을 쓰는 사람은 못될 것 같다.)

시집을 읽으며 시인이 말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부족한 인간인 나는 알아채기가 어려웠다.

결국 읽다가 멈추고 해설 편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황현산 작가님의 해설 편을 읽고 나니 조금 이해가 되어 시집을 모두 읽을 수 있었다.


인간인지 아닌지 구별되지 않는 구시대적인 캐릭터들은 추억 속에 영웅처럼 또는 그리움처럼 갇혀있다.

하지만 이 시들에선 그들이 살아난다. 우리 곁에는 여전히 마징가와 독수리 오 형제, 육백만 불의 사나이와 원더우먼이 살아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지독히도 인간적이며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는 인간의 모습을 닮았다고 여겨진다.

나도 그들을 닮아있다.


시는 여운과 느낌을 즐기는 독서다.

여유를 가지고 한 편 읽고 여운을 즐기다가 며칠 뒤 또 한 편을 읽곤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 소설처럼 자꾸 뒷부분이 궁금해져서 하루 만에 뚝딱 읽어졌다.

순식간에 읽히지만 로봇 범블비 보다 강한 힘을 가진 영웅을 만난 것 같은 시집이다.

평생 함께 할 친구가 되었다.

<마징가 계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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