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 흰 >
한강 지음.
소설
흰. 1일
며칠 전부터 가벼워지는 김치통이 신경 쓰이고 있었다. 더 늦지 않게 오늘은 김치를 해야 한다. 김치냉장고 아래칸에 넣어둔 비상용 배추 한 포기와 무 한 개, 시들해진 쪽파를 꺼낸다. 포기김치를 하자면 시간이 더 걸릴 테니 배추를 막 썰어 막김치를 만든다. 삼삼한 소금물에 절이니 더운 날씨로 쉬 절여져 점심 전에 빨간 김치가 완성됐다.
한동안 먹을 김치가 생기니 든든하고 여유로운 마음이 생긴다.
이제 책을 읽자. 어디 보자~
반짝이는 하얀 배추 줄기 같은 오래전 묻어둔 책이 눈에 들어온다. <흰>
한강의 글 소재로 종종 눈이 등장하는 순간이 나는 언제나 첫눈을 만난 듯 설레고 참 좋다.
'아, 어떻게 내 소원이 이 책 안에 적혀있는 건가?'
예전에 눈이 오면 문이 열리지 않는 곳에 살았다. 남편은 넌더리를 내지만 난 여전히 그런 곳에 살고 싶다.
언젠가 만년설이 보이는 방에서 살고 싶다고 그녀는 생각한 적이 있다. 창 가까이 서 있는 나무들이 봄에서 여름, 가을에서 겨울로 몸을 바꾸는 동안 먼 산 위엔 언제나 얼음이 얼어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열감기에 걸린 그녀의 이마를 번갈아 짚어보던 어른들의 차가운 손처럼.
흰. p.56
흰. 2일
냉장고에 무엇이 가득 들어있다. 불빛이 안 보이니 답답하다.
그러고 보니 수세미를 뜨느라 반찬 만드는 것을 등한시했다. 마음이 급해져 모닝커피를 후후 불어 서둘러 마신다.
장만 봐둔 채 며칠이 지난 시금치, 느타리버섯, 커다란 가지 3개, 숙주나물 한 봉지를 꺼냈다. 나물을 만들고 세 알 남은 감자와 호박, 양파를 듬뿍 넣은 탑탑한 고추장찌개도 한 냄비 끓였다.
그리고 누군가 저녁에 돌아와 냉면을 찾을지 모르니 달걀 열 개도 삶았다. 삶은 달걀을 안 먹으면 내일 조림을 하면 반찬 한 가지가 된다. 버림 없이 알뜰하게 식재료를 소비하니 만족감이 든다. 누가 칭찬하는 것도 아닌데..
먹을 것을 해두니 여유로운 오후를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서둘러 마신 커피의 여운이 아까워 다시 커피를 한잔 내리고 책을 들춘다.
어제 읽다 멈춘 곳에 걸쳐둔 희디 흰 보람줄을 한참 들여다본다. 참 예쁘고 곱다.
개는 개인데 짖지 않는 개는?
그 수수께끼의 싱거운 답은 안개다.
그래서 그녀에게 그 개의 이름은 안개가 되었다. 하얗고 커다란, 짖지 않는 개. 먼 기억 속 어렴풋한 백구를 닮은 개.
흰. p.62
흰. 3일
드디어 올해의 장마 빗방울이 시작한다.
초록으로 짙게 변하던 앞산이 하얀 안개와 투명하고 흰 빗물색으로 변했다.
‘만난 적 없는 언니를 어떻게 그렇게 애틋하게 그리워할 수 있을까?’
꽤 길게 이어지는 해설 부분은 넘기고, 작가의 말까지 내리읽는다.
그 흰, 모든 흰 것들 속에서 당신이 마지막으로 내쉰 숨을 들이마실 것이다.
흰. p.135
흰빛으로 반짝이는 보람줄이 계속 마음을 흔들었던 책을 덮는다.
독서 그 후.
<흰>의 독서는 아주 빨리 끝났다.
약간의 비가 내려을 뿐인데 장마라고 했고, 비가 오지 않자 장마가 끝났다고 했다. 그렇게 빨리.
그리고.. 그 후.
며칠간 어마어마한 폭우가 내렸고, 지금은 무시무시한 폭염이 진행 중이다.
책을 읽기 시작하던 날 담근 김치는 어느새 바닥을 보이니 또 김치를 해야 한다.
<흰>은 시일까? 소설일까? 수필일까?
겉표지에 분명히 쓰여있다. 한강 소설.
<흰> 속에는 흰 것들이 많이 나온다.
강보
배내옷
소금
눈
얼음
달
쌀
파도
백목련
흰 새
하얗게 웃다
백지
흰 개
백발
수의
작가의 말을 여러 번 읽었다. 늘 그렇듯 한강의 책에 있는 에필로그 또는 작가의 말은 또 한 권의 책을 읽는 것처럼 생각된다.
나는 '하얀'과 '흰'은 뭔가 분명한 차이가 있으며 그것은 어떤 느낌인데 그것이 무엇일까 늘 궁금했다.
그 "뭔가"에 대해 작가가 말해준다.
모국어에서 흰색을 말할 때, '하얀'과'흰'이라는 두 형용사가 있다. 솜사탕처럼 깨끗하기만 한 '하얀‘과 달리 '흰'에는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함께 배어 있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은 '흰' 책이었다.
작가의 말 중에 <소년이 온다>의 출간 후 휴식기에 바르샤바에서 열네 살의 아이와 머물던 생활에 대해서 언급한다.
아침이면 아이의 하얀 교복 셔츠를 다리고, 식사를 준비하고 간식 도시락을 싸고, 책가방과 체육복 가방을 메고서 천변길을 따라 학교에 가는 아이의 수굿한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창으로 내다보았다.
흰. p.185
나는 이 부분이 참 좋았다.
노벨문학상을 받기 이전에 여러 작품을 읽으며 이토록 아픈 글을 쓰는 작가가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정신력의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궁금했고, 작가를 걱정한 일이 있었다. 그녀가 나처럼 엄마라는 사실이 매우 안심이 되게 했다. 엄마라는 사람들은 무엇도 이겨내게 하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조산으로 아이를 낳게 된 스물네 살의 엄마와 태어나 두 시간 만에 죽은 달떡같이 흰 첫 아이는 한강 작가의 엄마와 첫아기(언니)에 대한 이야기다. 세상에 태어나 엄마 곁에 잠시 머물다 떠난 언니에게 주고 싶은 흰 것들에 대해 쓰고 있다. 엄마가 된 작가가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어쩌면 조금 쉬울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생면부지에 존재하지 않는 언니에 대해 그렇게 애달픈 정을 느낄 수 있음에 놀라워 전율이 일었다.
작가의 모든 작품 속에 흰 것이 들어있음을 알게 되었다.
<흰>의 독서는 집안일을 하면서도 3일이란 아주 짧은 시간이 걸렸다.
날씨는 약간의 비가 내렸을 뿐인데 장마라고 했고, 비가 오지 않자 장마가 끝났다고 했다. 그렇게 빨리.
그리고.. 그 후.
폭우가 내려 사람들이 죽고 다쳤고, 이제 폭염이 시작되었다. 기상이변이 두렵고 무섭다. 올해의 뜨거움 마저도 내년엔 간절히 그리울지도 모르겠다.
죽고 다치고, 힘들고 괴로운 사람들을 위로하고 공감하는 것은 마땅하며 그것은 사람이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된다.
또한 삶이란 죽음을 딛고 우뚝 서있는 것임을.
<흰>의 독서 후 내게 남은 것은 흰 것에 서려있는 죽음과 간절한 그리움. 측은지심이다.
언제나 죽은 자를 잊지 않고 온전히 보듬으려는 한강 작가의 마음과 글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
죽지 말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