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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멍 쉬멍 걸으멍

독서일기

by 그사이


<놀멍 쉬멍 걸으멍>
제주 올레 여행
서명숙 지음


놀멍 쉬멍 걸으멍. 1일

“아잇! 추워!”

하루 만에 반전의 날씨다.

아침 바람이 차게 느껴지니 바다를 보러 가고 싶어진다.

(바다를 보고 싶은 핑계는 참 많기도 하다)


한 3,4년쯤 전에 제주에 관한 책을 꼭 하나는 가지고 싶었다. 고심 끝에 구입한 책이 겉표지가 찢어진 것이 왔다. 표지가 왠지 여행 책자 같은 느낌이 들어 한번쯤 읽고 처분할 것만 같았다. 교환신청을 하지 않고, 테이프로 잘 붙이고 그대로 책꽂이에 넣어두었다.

자꾸만 책을 사서 묵혀두는 건지 모르지만 읽고 싶은 책이 책꽂이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하다.

이제 잘 묵은 책을 읽을 때가 되었다.

오늘은 제주 올레를 걷자.

동백꽃과 귤을 좋아하는 토종박새의 습성, 모음이 많고 받침이 이응으로 끝나는 단어가 많아서 음악적인 제주어의 특징을 설명하는 그의 얼굴은 소년처럼 빛났다.
동생에 대한 두터운 미움은 시나브로 엷어졌다. 우리는 뜨거운 여름날 올레를 탐사하면서 어느덧 ‘물장구치고 다람쥐 쫓던’ 어린 날의 사이좋은 오누이로 돌아갔다. 변변찮은 재정과 주변의 이해 부족으로 당초 각오했던 것보다도 올레 일은 더 힘에 부쳤고 외로웠다. 하지만 오랜 세월 반목해 온 동생과 한길을 바라보게 된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올레 길은 열리기도 전에 우리 가족의 깊은 상처를 아물게 했다.

놀멍 쉬멍 걸으멍. p.48

와랑와랑 이글이글

봉봉 밀물이 들어 바닷물이 가득 찬 상태

보리수나무 꼬마 보리수

2025년 9월 9일에..

놀멍 쉬멍 걸으멍. 2일

해도 안 해도 집안일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해도 안 해도 만족스럽지 않은 집안일.

기이한 일이다.

단골 메뉴인 콩나물 국과 제육볶음을 만들고, 대형마트 앞에서 손톱이 까매지도록 손수 까서 파시는 할머니의 고구마 줄기를 볶았다. 멸치를 넣은 조림이 하고 싶었는데..

’이런! 멸치가 없네.....‘


제주 올레길을 걷자.

이 해녀들의 작업장을 지나 중문 백사장을 가로질러 가다가, 잠시 쉬어가도 좋으리라. 고운 백사장 모래 위에 드러누워 잠깐 낮잠을 청해도 좋으리라. 속살을 간질이는 해풍의 애무를 느끼면서.
몇 시까지 어디에 반드시 당도해야 한다는 속박에서 벗어나야만 진정한 올레꾼, 진정한 간세다리가 될 수 있다. 당신, 시계를 자주 들여다보게 되는가. 그렇다면 아직도 숙제하듯 여행한다는 증거다. 무릇 여행자라면 그 공간 그 시간에 머무를 줄 알아야 한다.

놀멍 쉬멍 걸으멍. p. 100

간세다리 게으름뱅이


놀멍 쉬멍 걸으멍. 3일

며칠 사이 더 푸르고 깊어진 하늘은 마음을 살랑거리게 만든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까마득하게 보이는 재 너머 마을도 걷다 보면 어느덧 곁에 있고, 당도한 마을마저도 언젠가는 까마득하게 멀어졌다. 옛사람들이 ‘진주라 천릿길’을 걸어서 과거를 보러 오르내린 것이 과연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뿐인가. 걷기야 말로 우리가 밟는 고장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가장 유효한 방법이었다. 취재를 위해 버스로 택시로 휙 둘러봤던 곳이 두 발로 또박또박 밟으면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냈다. 훨씬 매력적이고 쌩얼에 가까운 모습을.
그런 경험을 쌓으면서 나는 깨닫게 되었다. 걸어서 다녀보지 않고서는 그곳을 안다고 결코 말할 수 없음을, 두 발로 발도장을 찍은 곳만이 온전한 내 것이 된다는 것을.

놀멍 쉬멍 걸으멍. p. 146

놀멍 쉬멍 걸으멍. 4일

혼자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꼭 가보고 싶었다. 하루 만보도 못 걷는 나는 반년쯤 걸으면 될까? 그런 생각을 했었다.

제주 올레 길을 뚫어 나가는 작가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이야기를 한다.

그 순례길의 고됨이 부럽다.

순례를 시작하면서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정성을 다해 몸을 돌보고 자신과 대화를 많이 하겠다고. 가장 소중히 여기고 맨 먼저 돌봐야 할 것에 무관심을 넘어 학대까지 일삼았던 지난날을 반성하는 뜻에서. 무엇보다 이 여정을 무사히 마치기 위해서.
매일 밤 침낭 속에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구석구석 마사지하면서 몸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참 수고했다, 사랑한다, 내일도 부탁한다.”

놀멍 쉬멍 걸으멍. p.221.

놀멍 쉬멍 걸으멍. 5일

천천히 읽고 싶은데 자꾸만 빨리 읽어진다.

간세를 부려보자.

더위 속에 구석으로 밀쳐두었던 수세미실 가방을 끌어낸다. 어떤 꽃을 떠볼까?

반짝이는 실로 꽃도 뜨고 눈송이도 뜬다. 수세미를 뜨면서 머릿속에 제주 바다가 그려진다.

쇠소깍의 오묘한 바다색과 산방산 앞바다의 도로롱도로롱 거리는 포말 소리.


반나절동안 수세미를 뜨고 나서 다시 책을 열어 걷기에 동참한다.

걷다 보면 스스로 해답을 찾게 된다. 왼발과 오른발을 옮겨놓는 그 단순한 동작 사이에 엉킨 실타래를 푸는 실마리가 있다. 걷기는 마법의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놀멍 쉬멍 걸으멍. p.286-p. 287

놀멍 쉬멍 걸으멍. 6일.

올레길을 걷고 싶은 열망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독서는 참 이상하기도 하지.

어느샌가 자꾸 읽는 책 속으로 빠져들어가 책 안에 살고 싶게 만든다.

관계지향인 여성의 속성은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에도 적용된다. 길을 걸으면서 들꽃에도, 풀에게도, 나비에게도 말을 건넬 줄 안다. 파도와도 몸을 섞을 줄 알고 바람과도 희롱할 줄 안다.

놀멍 쉬멍 걸으멍. p.301

놀멍 쉬멍 걸으멍. 7일

집안일하는 여자 또는 남자인 사람들이 좋아하는 날은

휴일이 지난 월요일.

애들 방학이 끝나는 개학날.

일들이 쌓여있지만 뭔가 호젓한 기분이 드는 날.

홀로 길을 걷는 것은 이런 기분이 아닐까?

두 화가의 공통점은 외로움이 아닌가 싶다. 그토록 그리던 고향에 돌아와 살면서, 고향에 머무르면서도 그들은 외로워한다. 고향의 풍경을 담아내지만 그 풍경 또한 쓸쓸하다. 하기사 인간은 어느 곳에 사나 외로운 존재인지도 모른다. 제주 여자들에게서는 불굴의 강인함이, 제주 남자들에게서는 섬세한 감성이 만져진다. 진화된 인간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두루 갖게 된다니 혹 그런 게 아닐는지.

놀멍 쉬멍 걸으멍. p.374

간단히 점심을 때운 후 책의 남은 부분을 마저 읽고 나니 집안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까미노 길과 올레 길은 멀리 있지 않다.

16년을 함께 지낸 반려견 비누와 나의 산책길. 우리의 길로 나선다.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바람 부는 날에도 올레를 걸을 수 있는가. 나는 대답한다. 바람 부는 날 올레 길을 걷게 된다면, 당신은 행운이다. 제주의 길만 아니라 제주의 삶을 느끼게 될 터이니. 바람 속에서 제주 바당은 당신에게 깊은 속살을 내어 보일 터이니. 어디 제주의 삶뿐인가.
당신의 인생에도 바람이 자주 불거늘.

놀멍 쉬멍 걸으멍. p.408

2025년 9월 15일. 책을 덮는다.


독서 그 후.


오랜 기자생활과 오마이뉴스 편집장으로 일하던 서명숙 작가는 마음에 품었던 꿈인 산티아고 순례길로 떠나기로 한다. 혼자서 천천히 걷고 또 걸으며 사람들을 만나고 결국 마지막에 이른다. 여정 안에서 작가는 제주 올레의 씨앗이 뿌려진 순간을 마주한다. 그리고 고향 제주에 돌아와 올레를 개척해 가며 사람들과 걷고 또 걷는다.

"우리는 이곳에서 참 행복했고 많은 것을 얻었어. 그러나 행복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눠야 한다고 생각해. 누구나 우리처럼 산티아고에 오는 행운을 누릴 순 없잖아. 우리,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각자의 까미노를 만드는 게 어때? 너는 너의 길을, 나는 나의 길을."

- 놀멍 쉬멍 걸으멍. p.236 -
순례길에서 만난 헤니의 말에서 서명숙 작가의 제주올레가 시작된다

우리 익히 알고 있는 제주올레의 코스를 걷는 것은 서명숙 작가가 나눠주는 행복한 발자국을 따라가는 일이다.

산티아고 순례길 내 꿈을 접은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점점 실현 불가능에 무게가 실린다. 그러나 제주올레를 꿈꾸는 것은 실현 가능할 것 같다.

나는 버킷리스트를 조금 조정한다.

내 비루한 평발과 체력, 언어능력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아 갑자기 기분이 좋다.

무엇보다 제주올레엔 산티아고 길에 없는 푸른 바다가 있다. 그것은 내가 걸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누군가는 여행 책자를 읽으면 떠나고 싶어 더 우울해진다고 한다. 이 책은 여느 제주여행 책자가 아닌 걷는 행복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루키의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달리기를 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이 책도 제주 여행을 권하지 않는다. 자신의 까미노를 걷고 또 걸으라고 말한다.

<놀멍 쉬멍 걸으멍> 책을 덮고 나서 실제로 제주올레를 걷고 온 것처럼 충만해진다.

몇 년 전 어떤 계기로 이 책을 선택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탁월한 선택이었음을 칭찬하고 싶어진다.

긴긴 연휴에 읽는다면 굳이 휴양지로 떠나지 않아도 충분한 휴식을 얻을 수 있는 책이다.

예쁜 표지 사진을 찍는데 이렇게 저렇게 찍어도 마음에 부족한 생각이 든다.

‘이렇게 좋은 책을.. 그때 교환할 걸 그랬다.’


꽤 두툼한 429 장의 <놀멍 쉬멍 걸으멍> 독서 후엔 제주어를 꽤 많이 알게 되는 재미도 있다. 낯선 말을 하는 여행지에 가서 돌아올 때쯤이면 친숙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언제 들어도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제주어로 나의 소망을 적어본다.


내가 걷는 길

와랑와랑한 햇볕 아래 바당 길을 따라
간세 부리며 꼬닥꼬닥 걷고 싶다.
떨어져 더 아름다운 동백꽃잎과
추사가 사랑한 제주 수선화를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한다.

by. 그사이



글벗 여러분과 독자님들의 가정에

풍요로운 한가위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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