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 망할 토마토, 기막힌 가지 >
박찬일 지음.
에세이
망할 토마토, 기막힌 가지. 1일
어디론가 떠나고 싶지만
떠나고 싶지 않기도 하다.
살림하는 사람이 하루만 집을 비워도 다음날은 집안일이 폭탄이 되어 돌아온다. 여행 간다는 아이의 짐에 넣을 옷가지를 세탁기에 돌려놓고 읽을 새로 읽을 책을 고르기로 한다.
“어! 요즘 읽는 발타자르의 <완전한 인간>은 어쩌고?”
철학책은 하루에 한 편씩만 읽기로 했으니 책 한 권을 추가해 문어발식 독서를 하기로 한다. 바야흐로 독서의 계절이 아닌가?
초판이 2014년이고, 10년이 흐르고 2025년 4월. 올해 개정판으로 나왔으니 신간이라고 할 순 없는 신간이다. 아무튼 집에서 묵힌 책이 아닌 새 책 향기 물씬 나는 책을 읽자. 제목이 기막히니까.
< 망할 토마토, 기막힌 가지 >
어째서 서양식 레스토랑에서 파는 스파게티는 이만 원이고 한식당의 국수는 팔천 원인가. 마요네즈와 색소를 올린 날치알롤은 이만 원인데 김밥은 오천 원인가 하는데 의문을 갖는 것도 인문학이다.
망할 토마토, 기막힌 가지. p.8
2025년 9월 23일.
망할 토마토, 기막힌 가지. 2일.
어제 메뉴는 짜장밥이었다. 오늘은 어떤 밥을 만들어야 하나?
생각할 것도 없이 당연히 콩나물이 재료다. 엄마는 집 식구가 여행이든 출장이든 먼 길을 나서는 날에는 꼭 콩나물 반찬을 만드셨다. 왜 고기나 비싼 재료가 아닌 하찮고 싼 식재료인 콩나물.
아기의 돌잡이 상에 긴 실다래를 놓는 것처럼 긴 것은 긴 수명을 상징한다. 오죽하면 옛날에 웃으면 복이 와요 라는 코미디 프로에서 귀한 자식이 오래 살 수 있는 이름을 짓는다며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 치치가포 사리사리 센타 워리워리 사브리깡 무드셀라 구름이 허리케인 담벼락 서생원에 고양이 고양이는 바둑이 바둑이는 돌돌이.."라고 지었다.(내가 이걸 어떻게 아직까지 기억하는 건지..) 결국 긴 이름을 말하다가 위험소식을 전하지 못해 큰 일을 당한다는 그런 코미디가 있었다.
운명이란 무었을 해도 다 소용없다는 내용이지만 간절한 부모마음을 담은 것은 분명하다. 엄마가 길 떠나는 가족들을 위해 기다란 콩나물을 요리한 건 그런 마음일 거다.
시험날에 영양 만점인 달걀이나 미역국을 만들지 않았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안전함이 깃들어있다고 생각한 식재료로 마음을 담아 음식을 만드셨음을 이제야 이해한다.
명절이 코앞으로 다가와서인가 엄마 생각이 많이 난다.
오호! 새로운 정보다. 우리가 아는 발사믹이 뿌려진 카프레제는 한국식이라고 한다.
카프레제(caprese)는 카프리 섬 요리 또는 카프리섬사람이라는 뜻으로 바질을 얹는 것이 정석이며 화이트와인 식초나 레몬즙을 쓴다. 발사믹은 북부에서 주로 쓰이는 것이며 졸인 발사믹을 뿌려먹는 것은 카프리 지역에는 없는 요리법이라고 한다.
나중에 광합성을 배우면서 콩나물을 떠올렸다. 서양식물이 지구를 살 찌운 결정적 메커니즘인 광합성을 배신하려는 은둔자적 태도라니, 광합성의 욕망을 억제한 콩나물은 햇빛이 들지 않는 곳에 뿌리를 곧게 뻗는다. 그래서 콩나물에선 음지의 냄새가 난다. 그 고유한 비린내는 태양을 모르는 식물의 체취랄까, 본능을 제어당한 슬픔의 냄새인지도 모르겠다.
망할 토마토, 기막힌 가지. p.37
망할 토마토, 기막힌 가지. 3일.
언제나 명절이 되면 치솟는 물가에 따라갈 생각이 없고, 이젠 그럴 필요도 없어졌다. 시아버님은 제사와 차례를 그만두자고 하셨다. 그렇게 짐을 덜어주시고 떠나셨다. 맏며느리인 나는 명절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고인을 더욱 그리워하게 되었다.
동태전과 호박전 그리고 세일로 산 부챗살에 칼집을 넣어 달달 짭조름하게 재워 적고기를 대신하였다. 때가 일러 햇 감도 아직이니 과감히 pass~
명절을 앞두고, 성묘를 다녀왔으니 우리 집 명절은 끝이 났다. 그래도 전부 치는 냄새가 퍼지니 명절 기분이 든다. 왠지 모르게 들뜬 기분과 피로가 함께한다. 음식은 언제나 향수를 동반한다.
“파바로티가 말이우. 인생이 살 만한 건 때가 되면 밥상에 앉아 무언가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수.”
그런 파바로티도 죽었다. 고향 모데나의 명물인 늙은 호박을 넣은 만두를 더 이상 먹을 수 없게 됐다. 살아 있을 때 우리는 더 먹어야 한다.
망할 토마토, 기막힌 가지. p.79
“p.67에서 오타를 발견했는데 출판사에 전화해 주어야 할까?”
[ 달걀로 ---> 달걀로 ]
망할 토마토, 기막힌 가지. 4일.
연휴가 아직 멀었으나 이것저것 장을 보다 보니 냉장고 속은 이미 명절 분위기다.
불빛이 안 보이니 답답하다.
며칠 전 전을 부치고 먹지도 않았는데 벌써 속이 느글거리며 편치가 않다.
오늘은 순두부찌개와 감자조림, 오이를 넣고 새콤 매콤한 도토리 묵무침을 해야겠다.
일단 책을 읽자.
“아, 이런 홍합탕이 먹고 싶네.”
홍합은 요리법이 간단하다. 그런데 홍합탕 하나를 끓이는 데에도 마늘을 넣네 어쩌네, 파는 넣네 안 넣네 말이 많다. 나는 순수한 요리법을 지지한다. 홍합 무게의 절반쯤 되는 물을 넣고 오직 홍합만으로 탕을 끓이는 것이다. 비린내를 잡아준다는 술도 필요 없고 마늘이며 파도 의미 없다. 더러 후추를 뿌리기도 하는데, 이거야말로 과공비례다. 홍합은 스스로 맛을 내는 희한한 재료다.
망할 토마토, 기막힌 가지. p.97
망할 토마토, 기막힌 가지. 5일.
별거 아닌 일들로 분주한 하루를 보냈다. 다른 사람들에겐 어떤 하루였을까?
저녁 뉴스들은 어쩌면 그 밤 보다 더 혼탁하게 느껴진다. 더 어렵고.. 심지어 선명하던 것들이 오리무중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비상상황이 정리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혹시 중요한 진실과 의미가 잊히거나 변색되진 않을까 싶은 두려운 마음이 든다.
하루 종일 책 한 장 못 읽고, 글 한 줄 못쓴 것이 마음에 걸린다. 환하게 불을 켜고 감기는 눈을 크게 뜨고 책 몇 장을 읽자. 그리고 독서 일기를 쓰자..
음식이 주제인 이 책은 어쩌자고 이렇게 무거울까?
엄밀히 말하자면 홍어를 삭혀 먹는 나라는 또 있다. 노르웨이 일부 지역에서 옛 관습에 따라 그렇게 먹는다고 한다. 반면 아이슬란드는 전국적으로 삭힌 홍어를 먹는다. 단, 크리스마스이브 전인 12월 23일 저녁 딱 하루. 한국처럼 먹지는 않지만 그 대신 구워 먹는 풍습은 있다. 수도 레이캬비크 시내 한복판의 유명 식당인 ‘스리 그 프락가르’에서 구운 홍어를 판다.
망할 토마토, 기막힌 가지. p.124.
예전 어느 방송 프로그램에서 아이슬란드인에게 “음식으로 사람을 차별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던졌다. 홍어를 지역 차별의 끔찍한 대명사로 쓰는 한국 현실에 대한 다른 시선을 얻고자 했던 것 같다. 그들은 아주 뛰어난 통역이 있는데도 질문의 요지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왜 음식으로 사람을 차별하고 구분하죠? 그게 뭐예요? 당연한 대답이었다. 오히려 그 반문이 좋은 답이 되었다. 물론 내 가슴 한편은 더 무거워졌지만. 우리 포털의 댓글창에서 여전히 몰이해와 차별의 언어로 홍어라는 낱말이 돌아다닌다. 한 번도 그 음식을 먹어보지 않은 자들의 언어로.
망할 토마토, 기막힌 가지. p.127
먹는 건 사람의 기억을 구성한다. 나아가 그 사람의 인생도 만들어 간다. 부디 홍어 한 점으로 우리가 더 너그러운 사람이 되기를.
망할 토마토, 기막힌 가지. p.128.
망할 토마토, 기막힌 가지. 6일.
명절 연휴가 시작되었지만 특별한 할 일은 없다. 평소처럼 매 끼니를 걱정할 뿐..
오늘 먹기 편한 김밥을 만들었다. 반찬이 필요 없는 일품요리로 긴긴 연휴를 나기로 잔머리를 굴려본다.
아침 늦잠으로 그동안의 피곤을 푸는 가족들을 깨울 필요는 없다. 아침을 준비하지 않아도 되니 일석이조다.
그리하여 내게 책 읽을 시간이 생겼다.
골목길을 돌고 돌아 -그 길마다 피순대를 비롯한 다른 맛집들이 널려 있으므로 꾹 참고 목적지까지 가는 내비게이션 정신이 필요하다- 한 집에 당도했다. 맛있는 집은 역시 기운으로 나그네에게 말해준다. 별게 아닌데도 손님만 많은 집에서는 결코 감지하기 어려운, 진짜 맛있는 집에서만 만날 수 있는 부엌신의 기운이 느껴진다. 손님들의 행복한 표정, 무뚝뚝하지만 정확한 손놀림으로 일하는 이들의 얼굴, 그리고 바닥부터 천장까지 가득 찬 절제된 식욕의 뼈대들. 그런 집에 들어설 때는 모자를 벗어야 할 것 같은 경외감이 들곤 한다.
망할 토마토, 기막힌 가지. p.170
망할 토마토, 기막힌 가지. 7일.
오늘은 김치만 있어도 충분한 잡채를 했다. 명절 행사가 없지만 국민 잔치음식인 잡채가 생각나는 걸 보니 기분을 내고 싶었나 보다.
북적거리고 적당히 불편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 그 모든 것이 명절의 맛이리라.
어릴 적부터 한적한 명절을 보낸 나는 시집의 분주한 고됨도 좋았다. 그걸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점심을 해 먹고 계절이 바뀌고 있으니 이불빨래를 한다. 세탁 시간이 길어지니 책을 마무리할 수 있겠다.
결핍은 우리의 혀를 변화시킨다. 나는 요리가 막힐 때 그 시절의 소시지와 소시지, 그리고 내 친구가 그리워하던 우유를 생각한다. 뭔가 모자란 상태의 요리를 본다. 그러면 요리의 그림이 선명하게 그려지곤 한다. 또렷하게 떠오르는 맛 하나를 중심에 놓고 요리를 구상하기 시작한다. 결핍이 원하는 ‘단 하나’를 드러내어 보는 것이다. 때로는 조금 모자라도 괜찮다.
망할 토마토, 기막힌 가지. p.209-p.210
음식은 추억에 색채를 입힌다. ‘옛날’이라는 수식어를 가장 자주 가져다 쓰는 것도 음식 파는 장사꾼들이다. 옛날 옷이나 옛날 집이라는 말은 흔치 않아도 옛날 짜장과 옛날 국수는 입맛을 당기게 한다. 우리는 그런 호소에 깊게 반응한다. 음식은 추억이고, 누구 말마따나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이런 글을 쓰는 일은, 불땀이 센 화력으로 닭국을 끓이는 일처럼 가슴을 덥힌다. 그것이 때로 뜨거운 눈물이 되곤 하지만.
망할 토마토, 기막힌 가지. p.223
추억에 색채를 입히는 맛을 그리며
책을 덮는다.
2025년 10월 4일.
독서 그 후.
추석 즈음에 읽은 책이라 그런지 어느새 내용이 가물거린다. 진작 독후감을 써뒀어야 하는데 게으름을 피우고 말았다. 독후감이 밀린 책들이 많이 있지만 이 책에 대해 쓰기로 했다. 집 밖의 가을이 너무 아름다운 탓이라고 핑계를 대고 싶다. 책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 본다.
이 책은 최근에 읽은 책중 가장 신간이다. 그동안 묵은 책들을 읽다 보니 뭔가 새책 냄새가 그리워졌고, 몇 권의 책을 구입하게 되었다. < 망할 토마토, 기막힌 가지>는 보기 들물게 구입한 책중 책꽂이에 넣지 않고 바로 읽게 되었다.
음식에 관련된 에세이는 내가 쓰고 있는 글에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을 하고 신중하게 선택을 했다.
박찬일 셰프에 대해서 큰 관심이 있거나 잘 알진 못했다. 단지 무뚝뚝하고 눈초리가 매서운 인상 때문인지 보통의 예능프로에 나오는 셰프들과는 좀 다른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이 궁금했다. 그가 이탈리아 음식을 한다는 것과 기자 출신이라는 것을 독서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어쩐지 음식이야기를 하기에는 뭐랄까 정확하고 똑 부러진 느낌 같은 것이 문체에서 느껴졌는데 전직을 알고 나니 이해가 되었다. 그의 글에서 맛있는 맛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았다.
더 신기한 것은 책 속에 담긴 사진이다.
오렌지색의 바탕에 흑백의 음식 사진이 실려있다. 무슨 음식인가 가만히 들여다보지만 맛있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맛있기는커녕 호기심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음식 이야기라면 사진은 화려하고 맛깔스러워 침이 꼴깍 넘어가고, 글을 쓴 셰프의 식당으로 한 번쯤 가봐야겠다고 생각될 만큼 군침이 뚝뚝 떨어져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
그는 글로도 사진으로도 유인하지 않는 것이 흥미로웠다. 신기한 것은 독서가 중반으로 들어가며 맛깔나게 쓴 글이 아닌데도 음식맛이 궁금해졌다. 진정한 이모카세인 여수 연등천 45번 집은 꼭 가고 싶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연등천이 많이 변했다고 한다.)
독서 후에 알릴레오 북스에 출연한 것을 보게 되었는데 유시민 작가가 그에게 물었다. "어느 게 더 마음에 드세요?"
"글 쓰는 셰프 vs 요리하는 작가"
박찬일 셰프는 멋쩍게 웃었다.
"둘 다 별로 마음에 안 들고.. 둘 다 못하는 사람인 것 같아서 요리사라는 걸 제일 좋아합니다. 주방장이나 요리사"라고 대답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 요리라는 것을 알 것 같다.
맛집 소개글도 아니며 자신의 식당으로 유인하는 것도 아닌 그의 글.
작가의 일화들을 통해 재미있게 읽다 보면 흥미로운 외국 음식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게 된다. 그리고 독서의 마지막에 이르면.. 그가 아닌 나의 추억 한 그릇, 그리움 한잔을 반드시 떠올리게 된다.
< 망할 토마토, 기막힌 가지>
정체가 무엇인가 싶고, 문학적인 글이 아니어도 마음에 울림을 주기에 충분한 쉬운 철학책이자 인문학 책이라 말하고 싶다. 이 가을에 누구나 읽기 좋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