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기오의 최고 명소이자 우리의 아지트인 SM City Mall 1층(서쪽문으로 들어오면), 북쪽 문으로 들어오면 지하 1층에 제법 큰 슈퍼마켓이 있어서 그곳에서 주로 시장을 보기로 했다. 왜냐하면 이번 여행의 총무이자 주방장인 금삿갓이 서울에서 필리핀 현찰로 환전을 많이 해 오지 않아서 신용카드를 써야 하기 때문이다. 재래시장이나 한국 마트는 신용카드를 받지 않는다. 이 슈퍼마켓이 바기오에서는 가장 크고 현대화되어 있을 것이다. 물건도 다양하고 농수산물의 신선도도 꽤 좋아 보였다. 더구나 이곳을 주 아지트로 활용하다 보니 일과 마지막에 속소로 돌아갈 때 여기서 대충 물건을 사면 편하기도 하다.
<신선 과일 야채 진열대>
슈퍼마켓의 구성이나 계산 시스템은 우리의 이마트, 홈플러스나 미국의 코스트코와 대동소이하다. 물건은 공산품, 농수산품, 가정용품 등 거의 모든 제품들이 구비되어 있다. 한국의 각종 식료품도 비교적 많이 구비되어 있다. 글로벌 상품 코너라고 표기를 한 곳에 매대(賣臺) 몇 개가 있는데, 슈퍼로 들어오는 입구에서 가장 오른쪽에 배치되어 있었다. 구비된 상품은 신라면을 비롯한 면 종류, 과자류, 김 종류, 햇반류, 캔 종류, 고추장 등 장류, 소주 등 주류가 있고, 그 외에도 한국의 상품들이 버젓이 한글 상표가 붙은 대로 판매되고 있었다. 단순히 이곳에 여행 오거나 체류하는 한국인들을 위한 판매가 아니라 현지인들도 많이 구매를 하는 것 같았다. 이젠 K-Contents만 세계를 누비는 것이 아니라 K-Foods가 세계인의 입맛을 자극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바기오에서 계속 살아도 음식으로 불편함을 느낄 이유가 전혀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슈퍼에서 파는 김치가 너무 조악해서 약간 실망했다.
<각종 열대 과일과 야채들>
오늘과 내일의 식사를 위해서 이것저것 구매를 했다. 라면, 소주, 된장, 쌈장, 소금, 후춧가루, 파스타, 토마토 페이스트, 귤소스, 참치캔, 햄, 두부, 파, 마늘, 양파, 로메인, 고추, 호박 등등 한 보따리다. 송재(松齋)의 주장으로 망고를 매일 먹기로 했으니 당연히 망고도 사고, 망고보다는 망고스틴이 최고라는 덕은(德隱)의 강력한 어필을 뿌리치지 못하여 같이 샀다. 그런데 여기서 파는 쌀은 모두 10Kg이라서 너무 많고, 품종이 안남미(安南米) 즉 Indica Rice, Long Grain이라서 구입하지 않았다. 한국 식품점이나 재래시장에서 적당한 량을 사야 한다. 이곳에서의 쇼핑도 카트를 밀고 다니면서 하는데, 철제카트가 있고, 청색 플라스틱 장바구니를 얹어서 밀고 다니는 조금 작은 카트가 있었다. 시장 보는 품목과 수량의 크기에 따라 카트를 선택하지만, 이것은 나중에 계산할 때 계산대를 달리하는 시스템이었다. 계산대는 총 12개가 있었는데, 청색 바구니 전용 계산대와 큰 카트 전용 계산대가 구분되어 있었다.
<SM수퍼에서 수산물을 사고 있는 주방장과 덕은>
이 슈퍼가 바기오 시민의 유일한 슈퍼인지는 몰라도 정말 계산대는 지옥 그 자체였다.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기회이다. 시장 보는데 30분이면 계산하는데 1시간 이상이 걸린다. 이들이 과거 역사적으로 서양인 스페인과 미국의 지배를 받아서 제반 시스템이 서양화되어 있는 것은 좋은 관행이지만, 계산대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무슨 사무를 처리하는 직원들의 일 처리 속도는 유럽사람 보다 더 느리다. 기다리면서 쳐다보고 있으면 속에서 천불이 난다. 그래도 어쩌겠나, 참고 기다릴 수밖에. 일하다 말고 전화받고, 옆 직원과 수다 떨고, 느릿느릿 세월아 네월아 이다. 직원 수는 많아서 물건 산 것을 빈 박스를 이용하여 친절하게 포장까지 해주는 건 좋은데, 너무 느리게 한다. 한국 같으면 관리자의 잔소리 듣고, 소비자의 인터넷 게시판이 도배될 상황이다. 이들에게 코스트코나 이마트 계산대의 캐셔들 손놀림을 보여 주어야 개선될까?
<길게 늘어선 계산 대기줄>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곳의 계산대에도 우선 처리해 주는 곳이 있었다. 바로 장애인, 임산부, 고령자들을 위한 프리미엄 계산대였다. 이곳이 처음인 우리로서는 이런 통로가 있는지 몰라서 몇 번 길게 줄 서서 느리게 계산했는데, 이것을 알고부터 경로우대 혜택을 톡톡히 누렸다. 코맥 매카시 원작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멋진 영화가 있긴 하지만 세계 어디를 가나 노인을 위한 이런 제도가 있다는 것에 위안을 느낀다. 영화에서는 돈 가방을 챙긴 주인공 노인이 결국은 흉수(兇手)의 손에 죽게 되니까 노인을 위한 나라가 없었겠지만, 해발 1,500 고지의 구름 위의 도시 바기오에서 경로우대를 받으니까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시장을 다 본 후에 택시를 타기 위한 대기줄도 하염없이 길고도 멀다. 이곳에도 경로우대 혜택이 있는 나라가 필리핀이다. 사회 시스템은 우리 한국보다 선진화된 것도 있었다. 일반인이 기다리는 줄과 임산부·장애인·노인들이 기다리는 줄이 따로 있다. 현관에서 택시를 잡아주는 직원이 있는데, 정확하게 두 대기줄을 교대로 잡아주니까 경로우대 줄은 금방 택시를 잡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