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팀은 모두들 묵직한 배낭을 둘러매고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그런데 쇼핑하는 잠깐 사이에 바기오의 날씨가 확 바뀌어 있었다. 한국 식품 마트로 오기 전에 산꼭대기에 있는 SM City Mall 옥상 정원에서 시내와 저 멀리 산들을 둘러보고 있을 때, 먼 산 쪽에서 검은 구름들이 점차 바기오 시내로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 당시는 아마 소나기 즉 열대지방의 우기에 하루 행사인 스콜이 쏟아지려나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쇼핑을 끝내고 나오니 그동안 이 먹구름 집단이 바기오 시내를 덮친 것이다. 시야가 50m 정도도 안 보이게 짙은 안개가 온 시내를 뒤덮고 있었다. 구름인지 안개인지 분간이 안 간다. 그런데 비는 내리지 않는 걸 보면 구름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높은 산에 올라가 보면 낮은 지역의 계곡이나 들판에 구름이 끼어서 운해(雲海)처럼 보이는 경치를 간혹 만난다.
<번햄공원은 안개에 젖어>
여기서도 먼 산의 계곡에 운해가 가득한 것을 보긴 했는데, 오늘은 바기오 시내가 운해의 바다에 잠기게 된 것이다. 방향 감각을 잘 모를 지경으로 짙은 안개가 마치 동화 속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 같이 몽환적이었다.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들도 시계의 어려움으로 전조등을 붉게 켜고 서행을 하니 더욱 신비로운 도시 모습이다. 번햄 공원을 지나서 숙소로 돌아가야 하는 우리들은 더듬거리면 범햄 공원 쪽으로 길을 잡아서 내려갔다. 공원의 모습은 더욱 신비롭다. 가보지는 못했지만 마치 무릉도원(武陵桃源)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다. 안갯속에서 희미하게 드러나는 나무들이 마치 수채화의 한 폭과도 같고, 이런 날씨에도 자전거 놀이 기구를 타는 사람들이 차라리 동화 속의 주인공 같았다.
<안개 속에서 놀이기구를 타는 사람들>
안개 하면 금삿갓 운사(芸史)는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이 겹친다. 과거 30년 전에 방송사 현업을 할 때, 승진하여 춘천방송국에 부장으로 2년간 근무한 적이 있다. 춘천이 군부대와 각종 공무원들의 교육도시라서 그런지 부임하고도 전셋집을 못 구해서 매일 새벽에 승용차를 운전해서 출근했다. 늦가을이나 초봄에 서울에서 새벽 6시에 출발하여 경춘가도를 달려가면 우측의 강물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당시에는 새벽에 움직이는 차가 그리 많지 않아서 가끔 차를 세우고 물안개 구경을 하다가 가곤 했다. 지금은 두물머리가 최고라고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 외에도 청평, 남이섬, 강촌, 중도 등 등 물안개 명소가 많았던 기억이다. 주변 경치, 시각과 장소, 일출의 빛 등 복합적인 요소가 어우러져 나오는 한 폭의 그림이라서 관찰자의 경험에 따라 다를 수는 있다.
<무건운 배낭을 매고도 아이들 처럼 즐겁다>
이렇게 좋았던 안개로 호된 교통사고도 당한 적이 있다. 이런 물안개들이 날씨가 추워지면 노면에 얼어붙어서 그야말로 투명한 빙판이 되는 것이다. 아스팔트의 경우는 빙판이 되면 색깔이 진한 검은색(Black Ice)으로 변하므로 새벽 운전이라도 감지할 수 있다. 그런데 시멘트포장은 빙판이 되어도 색깔이 변하지 않아서 알 수가 없다. 그날도 시멘트 포장 내리막길인데, 10여 대의 차량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런데 필자 금삿갓의 차량도 같이 덮치는 불상사가 일어난 것이다. 제동장치도 조향장치도 아무 소용이 없고, 오로지 중력의 법칙과 관성의 법칙만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다. 안개가 자욱할 때는 절대 사고가 잘 안 난다. 모두 조심하니까. 안개가 적당히 걷히고 앞이 잘 보이기 시작할 때 늘 사이렌(Siren) 요정이 달콤하게 유혹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바기오의 안개는 우리에게 사이렌의 유혹을 보내지도, 맑고 아름다운 달콤한 노래를 들려주지도 않았다. 아무 사고 없이 무거운 짐을 지고 숙소에 도착했다.